2010년 7월 3일 토요일

술고프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명색이 아오조라, 푸른하늘인데, 오늘처럼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 너무나 좋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막걸리처럼 보이고.
박달동 생활 만 2개월만에 첨으로 집에서 700미터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오면서 
내려다보이는 안양천. 캬, 오늘 정말 술맛 나겠다...감탄이 절로 나오는 날.

해도 요즘 내 생활이 마냥 칠렐레 팔렐레 할 수만은 없어 
가까이 사는 갱이언니부터
파주로 매일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는 은영부터
지난 주 일욜 새벽까지 끌고 다니며 양주 사준 웡기부터
술 하면 떠오르는 최목수부터 
지난번 벙개도 쌩깠던 동기 모임부터 별의별 껀수가 다 생각나고 술이 고팠다.

술 자체가 좋다기보다 그냥 이런 날 술꾼들끼리 모여 낄낄 거리는 그 분위기가 더 그리웠다고 해야 하나. 성삼 오라버니도 생각나고, 영우 오라버니도 생각나고. 
직업, 성별, 빈부차, 성적 취향,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술꾼들이 마구 생각나는 날.
대학교 교생 실습 갔을 때 담임선생님도 생각나네. 선생님도 한술하셨거든.
볼프람도 생각난다. 하루종일 자전거와 씨름하고 5시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일단 맥주 2병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시작하는 볼프람.
흑, 오늘 같은 날 볼프람이랑 술마시면 정말 좋겠다. 볼프람은 뭐하고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술통, 통이
회의가 있다고 오후에 학교에 갔는데, 아무도 통이 오늘 제정신에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8시에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럴 수가!!!
그러더니 학교 축제를 위해 징집 당해 요즘 열심히 추고 있는 스윙댄스를 춘다. 


허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살짝 맥주 한 잔할까 운을 띄우더니 얼마나 술을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겠다고 
자신을 시험대에 올린다. 

술에 대한 본능을 가까스로 이성으로 누르고 컴 앞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11시 반쯤 술꾼 은영한테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묻는다. 
"언니, 지금 어디예요? 지금 당장 갈게요. 하하하하."
전화기로 살짝 술냄새가 전해온다. 
"오늘 같은 날 언니가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거 같아서, 하하하하. 마신 술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요, 하하하하. 염치불구하고 그리로 가려고요, 하하하하."
"어? 나 시댁이야."
"지금 어디야?" 
"합정역이요. 하하하하."
내 맘이, 지금 합정역 아니 철산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게 지금 내 맘이야. 

내일 시간이 되면 무한도전 하는 시간을 피해 만나자고 하고 
아쉬운 마음을 진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통은 헤드폰을 끼고 브라질 : 네덜란드 축구를 보고 있다. 
마침 담배를 피러 나가는 통에게 속삭였다.
"맥주 3병 콜?"
하하하하, 나는 결국 지금 맥주를 마시고 있다. 

2010년 7월 1일 목요일

나무와숲에서 생긴 일

요즘 통네 학교 도서관 '나무와숲(이름이 맘에 든다.)'에서 일주일에 한번 2시간씩 도서관지킴이를 하고 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하루에 고작 5~10명이 책을 빌려가는 도서관이라 지킴이로 할 일은 없다. 청소년지킴이와 잘 지내는 일이 어른지킴이가 할 중요한 일이라고 들었다. 그 활동으로 청소년지킴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있다.

내가 당번인 날 청소년지킴이인 아이는 눈썹이 진하고, 말도 붙임성있게 잘하는 아이이다. 첫날은 아무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자리만 지키다 왔고, 두번째날은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부담만 갖다가 결국 가는 당일날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 뽑아 읽어주자 싶어 가져갔는데, 청소년지킴이 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냐고 묻는다. 잉, 아닌데. 몰랐는데. 했더니 당연히 알 줄 알았죠. 지킴이 일지에 서지 목록도 써야 하는데. 이런.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공염불이었네.

나랑 같은 당번인 아이는 책이 싫단다. 그럼 왜 도서관지킴이를 하느냐 했더니 자기는 학교가 좋단다. 초등학교도 인근 벼리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나왔단다. 일반학교에 대해서는 친구들을 통해 들은 게 전부여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다니고 있는 대안학교가 좋단다. 그래서 학교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는데, 도서관지킴이를 구한다고 해서 자원했다고 한다. 그외에서 컴퓨더 관리도 한다고 한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어주어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도서관의 책이 아니어서 펼쳐보지도 못했다. 일지를 살펴보니 박기범의 <문제아> 같은 책을 읽어준 게 보인다.

ㅋ. 내가 가져간 책은 <일본고서점그라피티>라는 일본헌책방에 관한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일본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내부구조도를 그리고 헌책에 대한 의견, 헌책방에서 구한 책 이야기 등을 써 놓은 책이다. 책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하려고 선택한 책인데 물건너 갔다.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 구입해서 갖춰놓고 읽어주어야 할까, 암튼 보류.

그리고 나서 황급히 책꽂이를 뒤져 고른 책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우리나라에서 한비야를 모르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다소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물, 한비야. 역시 그 아이도 알고 있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알고는 있지만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옳거니. <중국견문록> 외에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같은 책이 있었지만, 내가 읽은 책인 <중국견문록>을 골랐다.

하루에 읽어 주는 양은 한 챕터. 책을 읽어 주기 전에 책을 고를 때 어떤 것을 먼저 보냐고 물었다. '차례요.'라고 대답한다. 먼저 저자 약력을 소개하고, 판권을 살펴본 뒤, (머릿말을 읽어주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장을 읽어주었다.

한비야는 44살에 중국어학연수를 떠났다. 단지 전세계 4분의 1이 쓰는 언어라서 배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에서 일을 하려면 중국어가 필요하겠다 싶어 중국어학연수를 떠났다 한다.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외국어 다섯 가지를 마스터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장 "너무 늦게 왔는데요"를 읽어주고 어땠냐고 물으니, 감동적인데요 한다. 실패하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책 잘 읽으시는데요. 이 녀석이, 귀가 뚤리긴 했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다니. ㅋ. 44살이라는 나이에 배낭 하나 매고 1년 어학 연수를 떠날 수 있는 한비야의 용기가 부러웠다. 라오스를 여행할 때 도시 혹은 두메산골에서 '월드비전' 사무실과 '월드비전' 파놓고 간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 자아도취에 빠져 다음에도 이 책을 읽을까 하니, 냉정하게 책도 많은데요, 한다. 그래그래. 알았어, 다음엔 다른 책으로...ㅠ.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명색이 도서관사서라고 앉아 있다가 책 한권을 빌려 왔다. 행여 누가누가 책 많이 빌리나 순위에 들고 싶어서는 절대 아니다. 이 많은 책을 두고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그날따라 눈에 띄었던 창비에서 낸 성석제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뽑아왔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부채부터 해서 꽤나 많은 광고와 판촉물을 날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도 읽지 않았던 책인데.

목록을 보니 우선 <책>이라는 단편이 눈에 띈다. 책읽기보다 책 자체를 좋아하는 나는 책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저절로 그리로 간다. 이 책의 주인공인 '당숙'의 포스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책을 사다 나르는 나의 행태에 불만을 느끼는 통이 통감할 내용이 아닌가 싶어 잠깐 옮겨 본다.


당숙은 책이 많다. 책이 많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달라 열권으로도 많은 사람이 있고 만권도 적은 사람이 있다. 당숙의 기준으로 책이 집안을 채우고 넘치게 되면 많은 것이고 더 들어갈 여우가 있으면 적은 것이다.
당숙에게 책이 많아진 건 이미 3년이 넘었다. 이로 인해 고민스러워진 사람은 당숙이 아니라 당숙모다. 당숙이 이런 일로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많은 책을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이 대목에서 나는 통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더 대범하게 책을 들여놓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당숙모는 3년 전부터 집을 채우고 남은 책은 아파트 지하에 창고를 지어 보관해 왔는데 그 창고마저 비워주어야 할 형편이 되자 이삿짐쎈터에 책을 맡겼다고 한다. 종이상자에 책을 담아 보관해주는 비용은 한달에 십오만원이고 일년으로 장기계약하면 십이만원으로 할인은 해준다.(옳거니)

대략 줄거리는 이처럼 책이 많은 당숙을 둔 조카가 당숙의 책을 맡아주겠다고 나서고 모월모시 그 책을 자기 집으로 옮기는 이삿날의 이야기다. 이삿날 책보다 먼저 조카의 집에 온 당숙은 조카의 집에 있는 잡지 몇 권에 넋이 나가 자기 책 이사는 남의 일처럼 관심이 없고 책만 읽다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표현했을까? 싶은 마음과 함께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이어 이 책의 표제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과 <천애윤락> <욕탕의 여인>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천하제일 남가이>를 죽죽 읽어나갔다.

과연 듣던 소문대로 성석제의 입심이 장난이 아니다. 김원룡이 쓴 <나의 인생 나의 학문>을 읽으며 킬킬 댔을 때 무슨 만화책이라도 읽냐고 놀림을 받았는데, 성석제의 소설 역시 가슴을 후벼파는,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찌질이 루저들의 이야기임에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빅재미를 주고 웃음이 뻥뻥 터진다.

주인공 하나같이 그렇게 바보처럼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도무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있나. 세상의 모든 비극은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읽는 내내 영화 <파이란>의 최민식이 떠오른다. <천애윤락>의 주인공 친구 동환이 이야기를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눈물이 나서 혼났다. 옘병. 나보고 이 책 인물들처럼 살라고 하면 진작 접싯물에 코박고 죽었을 거다. 이런 된장. 

2010년 6월 29일 화요일

1년 전 오늘,..09년 6월 29일 월요일

어제 통과 함께 안양천을 걸으면서 1년 전 어디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독일에서 덴마크로 넘어가려던 시기였다. 오랜만에 여행 수첩을 꺼내 찾아보니 우리의 기억이 맞았다. 일기장을 아낀다고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이 적은 일기가 반갑다.

09년 6월 29일 월요일. 06:30 AM. 또 다시 찾아온 월. 덴마크로 간다.
침낭 안이 덥다. 가끔 물 떨어지는 소리. 아, 어젯밤에 멀리서 갈매기 소리가 들렸다. 항구 가까이여서 그런가. 숲에선 온갖 새들 소리가 들린다. 독일은 야생 새들의 천국인 것 같다. 이상한 꿈-오빠가 술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불길하다. 왜 오빠는 그렇게 남을 탓하며 살 수밖에 없는 걸까? 통 코고는 소리, 새소리, 간간히 기차소리, 차소리.

오늘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독일 북부 날씨는 아침 흐리고 비, 저녁이면 맑은 하늘을 보인다. 지금이 몇 시일까? Fermann burg 공원. Fermannsund bruke를 넘기 위해 같은 길을 한 바퀴나 돌았다. 들판 옆길 닫힌 철문을 열고 나가야 207번 도로를 탈 수 있다. 옘병! 가는 길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오는 길은 아주 simple하면서. 한 할아버지의 설명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기 전 통이 아주 비장하게 앞서 나가면서 외친다.
"내 뒤에 따라붙어! 바람이 많이 부니까!"
Fehmannsund bruke는 한 500미터나 될까? 생각만큼 바람은 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통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다.

*주행기록
주행거리 : 44.44km
주행시간 : 3:24:08
평균속도 : 13.0km
최고속도 : 28.9km
총 거리 : 636.2km

*쓴 돈 :
1)슈퍼마켓 penny에서
pilsner 맥주 6병*0.5l 1.69유로
플라스틱 병보증금 1.50유로
돼지고기 완자(술안주) 1.75유로
스파게티 500g 0.49유로
오이 0.39유로
5.82유로(약 10,000원)

2)엽서 1.05유로

*합계 : 6.97유로(약 12,000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덴마크로 가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며칠째 달리던 날이었다. fehmann이라는 섬을 넘어 배를 타고 덴마크로 가야 하는데, fehmann 섬으로 가는 도로를 눈앞에 두고 진입로를 찾지 못해 몇 바퀴를 돌았던 것이 기억난다.


통로를 찾고 보니 개구멍만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는 사람만 다닐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씩씩거리며 찾아헤매다 fehmann 섬에 도착해, 도착한 기쁨과 이제 곧 덴마크다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슈퍼에 가서 플라스틱 맥주 6병(싸서 아주 머리가 아픈 술)과 돼지고기 완자를 사서 낮술을 마시고 퍼졌다. 술을 마시고 취한 나는 오늘 저녁 덴마크 가는 배를 못 타겠다, 통은 왜 못 타냐, 덴마크 넘어가서 텐트 칠만한 곳을 바로 찾겠냐, 차라리 여기서 하룻밤 더 자고 내일 넘어가자 대판 싸우고 말도 안 하고 잤던 안 좋은 기억도 더불어 떠오른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날도 많았지만,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평생 싸울 걸 다 싸우고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우린 가끔씩 싸운다. 싸움은 싸움일 뿐 삐치지 말자. 아, 이 질기고도 질긴 애정이여!

어떤 여행 이야기를 골라 읽어야 하는가?

어떤 여행 이야기를 골라 읽어야 하는가?

인생이 여행이고, 여행이 인생이다. 따라서 여행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철이 들면서부터 여행을 가까이 하는 일은 인생을 배우는 데 있어서 여간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여행이란 이름이 붙어나오는 여행 이야기가 하루에도 수십 종, 수백 종에 이르는데 그 많은 여행 이야기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골라 읽어야 하는가? 이것도 매우 필요한 결정이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좋은 여행 이야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마치 훌륭한 스승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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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문학전집의 추천사인 '어떤 작품을 골라 읽어야 하는가'에 나오는 '문학'이라는 단어를 '여행'으로 바꾸어 보았다.

인생이 문학이고 문학이 인생이다. 따라서 문학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철이 들면서부터 문학작품을 가까이 하는 일은 인생을 배우는 데 있어서 여간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문학이란 이름이 붙어나오는 작품이 하루에도 수십 종, 수백 종에 이르는데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골라 읽어야 하는가? 이것도 매우 필요한 결정이다. 어떠한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좋은 책을 대하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마치 훌륭한 스승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그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문학'이라는 단어를 '여행'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여행과 문학은 동격이다?
실로 좋은 책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접하게 해 주고, 내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게 해준다. 직접 두 발로 찍고 돌아다니는 여행은 넓은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되고, 다른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는 간접 경험과 대리 만족이 되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많은 여행책을 사서 모았고, 여행 이야기, 기행문, 역사, 문화, 예술 등 많은 책들이 낯선 곳에 대한 여행을 꿈꾸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가 내 가슴에 불을 질러 주었듯이 시덥잖은 나의 여행 이야기가 여행을 꿈꾸는 누군가의 가슴을 사정없이 불질러 주었으면 좋겠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100625. 금. 소소한 일상이 기다려진다.

한국에 돌아온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벌써 두 달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통과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여행 내내 매일 쓰던 일기도 쓰지 않고, 보고 대회처럼 쓰던 블로그도 개점휴업 상태로 내팽개쳐 두었다. 내 맘이 요즘 그렇다.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을 여행하면 좋겠다 싶었다. 제주도 자전거 여행이나 남도 자전거 여행도 좋고, 산티아고를 달리면서 제주도 올레길이라든지 지리산 둘레길도 걸어보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와 집이 없는 상태로 동가숙 서가식 하다보니 여행을 떠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도 안 만났던 건 아니다. 친구들도 만나고 산청에도 두번 다녀왔고, 괴산도 잠깐, 짧게 남도 여행도 다녀왔다. 때론 지치기도 했고, 때론 휴식도 되었다. 모두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인데, 그동안 외국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둘이서만 빈둥거리다 한꺼번에 사람들을 만나려니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 위장, 간장이 버텨내지도 못했던 것 같고. 그래도 모두 반가웠다.


7월 말경에 새 집으로 이사를 갈 것 같다. 이사 가기 전까지 좀더 시댁에서 지내야 한다. 어머니 냉장고 옆에 우리 냉장고, 어머니 세탁기 옆에 우리 세탁기, 어머니 장농 앞에 우리 장농, 우리 서랍장 위에 어머니 서랍장, 한 방 가득 채워져 있는 책장과 책들...을 추스리고 이사 준비를 해야 한다. 냉장고도 정리하고, 안 입을 옷도 정리하고 해야 하는데, 아직 시간이 있어서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금 가장 기다려지는 건, 손으로 빡빡 문질러 빤 빨래를 탁탁 털어, 좋은 볕에 말리고, 빨래가 마를 때까지 책 읽다가 졸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다.



덴마크를 달리다 발견한 빨래

프랑스 순례자용 숙소에 널린 순례자 빨래


스페인 어느 가정 집에 널린 빨래

스페인 순례자의 길 순례자용 숙소에 걸린 빨래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100518. 비오는 화요일...나는 달리고 달렸다..

비가 온다.
봄비라고 하기엔 어색한 비가 온다.
이 비가 그치면 따뜻해지려나 다시 추워지려나 종잡을 수 없는 오락가락하는 비.


며칠 새 이틀 간격으로 달렸더니 몸과 마음이 지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반갑지 않거나 부담스러운 사람은 만날 수도 없어.
몸이 말을 안 들어.

무더기로 만나다 보니 인사만 나누고 그냥 술만 펐던 것 같아.

반가워서 마시다 택시에 몹쓸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오랜만이라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술잔을 들기도 하고,
술도 덜 깬 지친 노구를 끌고 동기 모임 갔다가 술 안 먹고 안주만 축낸다고 구박만 잔뜩 먹고,
새벽 한 시에 고등학교 친구네 잠자러 갔다가 친구 남편 보기만 미안하고,
이래저래 민폐도 끼치고 부족한 이야기에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만나길 잘했어.

하지만 난 달리기보다는 걷는 게 체질에 맞는 거 같아.
담에 만나면 천천히 걷는 기분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눈도 맞추고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지.

2010년 5월 6일 목요일

D+365. 100430. 금. 드디어 그리고 무사히 1년 만에 한국으로...

2009년 5월 1일 떠났던 한국,
2010년 4월 30일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방콕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2시간 비행을 거쳐,

쿠알라룸푸르 LCCT 공항에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으로 이동해 9시간의 기다림,

다시 쿠알라룸푸르에서 인천까지 약 6시간의 비행.

한국은 유럽에 비하면 참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곳을 1년만에 돌아간다. 1년만에 돌아올 곳을 우리는 왜 떠났을까? 1년 동안 난 뭘 보고, 뭘 느꼈을까? 뭐가 달라졌을까? 뭐가 달라지긴 달라졌을까?

비행기는 이착륙할 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사고 위험이 높아, 승무원들도 안전에 안전을 확인하고 조심하는 긴장되는 순간이다. 우리도 나라와 나라를 이동할 때 가장 많은 돈이 많이 들고 가장 신경이 예민해진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다보니 일반 여행자보다 2배 3배는 짐이 더 많다. 리스본에서 자전거를 먼저 프랑크푸르트로 부치고 바르셀로나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갈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올 때 불어난 짐들에 과연 추가부담없이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인가가 가장 관건이었다.

1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방콕에서 쿠알라룸푸르, 쿠알라룸푸르에서 인천으로 마지막 비행이 남아 있다. 과연 우리의 자전거, 짐들과 함께 과연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를, 우리 자전거를 무사히 아무 불평불만없이 한국으로 보내줄것인가? 공항 직원들만 보면, 보딩을 하러 갈 때면 가슴이 콩알만해진다.
방콕 카오산에서 타는 리무진 AE2에 실은 자전거 박스. 한 박스당 50B의 추가 비용을 내면 실어준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정신없이 자전거 박스를 두 개에서 세 개로, 세 개에서 다시 두 개로 풀었다 쌌다 하면서 어느새 이골이 났다.
하도 싸고 풀었다 싸고 풀었다 해서 구멍이 나 버린 박스.

통은 있는 힘껏 박스를 오무리고 나는 테이프를 뜯어 볼펜으로 짝짝 끊어 붙이면서 우리 공항에서 반값에 포장서비스나 할까 하는 농담까지 할 정도로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2010년 4월 30일 오천 6시 30분.
한국을 떠난 지 꼬박 1년 만에 무사히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슴이 설렌다.

1시쯤 샌드위치를 먹고 잠이 들고, 5시쯤 다시 기내식을 주었는데 졸음이 밀려와 졸다 보니 어느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쌀쌀한 날씨가 우리를 반긴다.
기내방송에서 8도라고 했지? 8도?
연일 38도 이상의 날씨에서 5개월 가까이 생활하다 보니 감이 잘 가지 않는 날씨다.

쌀쌀한 날씨에 정신이 들었나,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다 일기장을 놓고 내렸다. 짧은 다리로 헐레벌떡 탑승구로 달려가니 벌써 문이 닫혔다. 승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짐을 놓고 내렸다고 부탁해 다시 문을 열고 비행기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가는데, 통이 흘리고 간 자전거가방 끈이 보인다. 이론 나만 흘린 게 아니었네. 자리에서 무사히 일기장을 찾아 나왔다. 십년감수한 순간.

자전거를 찾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출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부모님께서 공항에 나오시겠다는 걸 리무진을 타고 가겠다고 나오지 마시라고 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 이제 정말 한국이구나.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구나 안도감이 밀려든다.

마지막 남은 관문은 자전거 박스를 싣고 무사히 안양 시댁으로 가는 것. 리무진노선표를 둘러보니 '석수동'을 지나는 리무진이 보인다. 한 장에 9,000원씩 표 두 장을 끊고 8시 50분 버스를 기다렸다. 리무진이 도착해서 자전거를 실으려하니 한 대당 2,500원 해서 5,000원 추가 요금을 내라고 한다. 비싼 금액도 아니고 실을 수도 있다니 다행이다 싶다. 우리나라도 참 좋구나.

짐칸에 자전거박스를 싣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집까지 1시간 남짓 남았다. 인천대교를 건너 광명을 거쳐 안양으로 오는 길. 아, 봄이구나. 겨우내 메말랐던 산자락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은 나무들이 참 이쁘다. 어, 꽤나 나무가 많아 보이네. 이렇게 나무들이 많았나?

따뜻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버스는 KTX 광명역을 지나치고 있다. 석수역 앞 중앙차로에 도착했다. 자전거박스를 번쩍 들어 길 건너 주유소앞으로 옮겨 어머니와 아버님을 기다렸다.

바람부는 안양대로에서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오매불망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던 어머니, 아버님이 나타나셨다. 우리 어머니, '아이구, 우리 애기! 별일 없었어?' 하시며 꽉 끌어안아 주신다.

아버님 차 뒷좌석에 자전거 박스 하나, 자전거 박스 풀어 자전거 한 대를 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년을 떠돌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