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101130. 여행과 거리두기

오늘 나무와숲에 갔다가 봄비한테 들었다.
요즘 통이 왜 그렇게 시니컬하냐고.

아, 통이 여행을 다녀와서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다, 했더니,

1년 정도 여행을 다녀온 다른 선생이 그러더란다.
일상생활로 복귀하려면 여행을 다녀온 기간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들을 살려 보자 야심차게 학교로 복귀했던 통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펼치기는커녕, 꺼내보기도 전에,
매일같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의, 일, 회의, 일 속에서
옴싹달싹 못하고
그 스트레스를 오롯이 술로만 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에 다가가기
정신없는 직장생활 속 짧은 여행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어렴풋이 긴 여행을 상상했던 게 여행 떠나기 5년 전인 2004년부터였던 거 같다.
왜 일은 한꺼번에 터지는지 복잡한 가정사로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이나 가버릴까 생각하던 차에
통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여행에 대한 꿈은 사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가 아닌 둘의 여행을 꿈꿀 수 있어 좋았다 해야 하나.
둘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자 했던 시기가 2007년이었다.
하지만 우리 여행은 2009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5년 동안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여행을 생각하며,
여행지에서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며 참고 견뎠다.

여행과 마주하기
그리고 2009년 5월 1일 여행을 떠나
결코 그날이 올까 싶었던 2010년 4월 3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하는 동안 힘들고, 재미있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내 인생에 최대로 고민이 단순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어디로 갈까? 오늘은 어디서 잘까?
이 고민만 해결되면 너무나 행복했다.
어쩌다 누군가가 손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여행과 거리두기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통과 나는
적잖이 혼란스럽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방황 아닌 방황을 경험하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에 복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나대로, 통은 통대로.
나는 그나마 통보다는 서서히 시동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도 온갖 스트레스에 빨리 모든 일을 접고 싶다는 생각뿐이고,
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빡세어진 학교라는 전쟁터에
거의 무장해제된 채 떨구어져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통 일병일지도 모른다.

뭐가 문제인가? 치열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우리만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가 힘들었는데,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여행한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돌아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짧은 주말 여행을 다녀오면 주초 하루 이틀 고생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잊고 살았고,
한 열흘 미국이나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면,
시차로 한 1주일 정도 고생하다 다시 바쁜 일상 속에 뭍혀 버렸다.

1년 여행을 하고도 이런데,
2년, 3년, 5년째 여행하는 사람은 어떨까?
10년째 여행하는 사람은 아예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지금은 여행과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기.
나를 잃지 않으면서 이 생활에 적응해 가는 것.
언제쯤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게 될까?
그때가 오면 난 지난 여행을 잊고 생활에 찌들어 살고 있는 건 아닐지?

댓글 5개:

  1. 10년 여행한 사람은, 돌아갈 곳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있진 않을것 같아요.
    그냥 가 닿는 곳에 가게 될것 같아..
    그리고,,
    언니가 이런 고민을 안하게 될 날이 온대서,
    생활에 찌들어 살게되진 않을것 같고욤 ㅎ

    여행때는 정말, 최고로 단순해져서
    무척 홀가분한 기분이였는데..
    ㅎㅎ

    여행이 뭐 별건가?
    갔다왔다고 대순가?
    일단 편하게 내려놓고
    삶을 살다보면,
    여행의 언니가 하나 둘, 순간순간 나타날것 같아요.
    여행다닐때,
    낯선환경에서 낯설어도 맞춰가며 적응했던것처럼
    이곳에서의 삶을
    튕겨내려기보다는 유연하게 받아들여보는 그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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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굳이 나의 '의미 부여 과다증'과 내가 싫어하는 '조급증'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거 같아.
    여행이 별건 아니지만, 그런 여행은 앞으론 다시는 떠나지 못할 거다하는 아쉬움..거기서 오는 집착...그런 거 같아. 그렇게 쿨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겠지...아무튼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고쳐야 할 것 같아...ㅎㅎ.
    고마워. 조만간 얼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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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여행 후유증도 있긴 하지만 통의 일은 넘넘 빡세.. 게다가 맘은 20대, 몸은 40대.. 옛날 20대 일때는 몇일 밤을 새고 회의하고 글 써내고 해도 지치질 않았던것 같애. 그리고 특히 그 일이 내게 넘넘 의미가 있다면 더 그렇구.. 그냥 이슬만 먹고도 살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근데 어느 시점부턴 그게 안되더라구.. 마음도 약해있고 몸도 약해있구.. 여튼간에 통이 넘 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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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수진 말이 맞아. 통네 학교는 모두 애를 쓰고는 있는데, 업무 과다다다다다야. 그 많은 시간 일을 하는데도 왜 그런가? 그럼 효율성의 문제가 아닌가...어떻게 풀어야할지도...그걸 통은 술에다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고...
    통이 내 블로그를 안 봐서 그런데, 지난 11월달에 한번의 무단 외박을 포함해서 4번을 아침 6시,7시, 8시에 들어왔어. 정말 통을 만난 이후로 첨으로 진지하게 갈라서는 걸 생각해보게 되었지. 부족한 건 참을 수 있어도 이기적인 건 못 참는다 면서 말야. 이건 아닌 거 같은데..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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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쓰고 나니 한편으론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리네. 아무리 통이 내 블로그를 안 본다고 하지만, 내가 너무 야박한 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통의 힘듦까지 끌어안아야 하는 건가? ㅠ.ㅠ 그러기엔 내 마음도 여유가 없는데...한국에서 산다는 건 내내 이런 삶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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