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 있으면서 이곳의 역사 정도는- 깊이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요약한다. 출처는 lonely planet07판:영어 해석하느라 죽는줄 알았다. 덕분에 나름 영어 공부가 되긴했다.
덤으로 싱가포르와 부루나이(brunei)도 함께..
1. 당연 오역이 지천에 깔려 있소.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봐주시고 지적은 따뜻한 댓글로..
2. 글쓴이가 다소 영국편을 많이 거드는 것 같소. 때문에 번역을 옮기면서 나의 관점과 무관한 부분이 많소
이점 양해 바라오.
3. 다소 길어서 3부에 나눠 실토록 할 것이오. 중간 중간 올리도록 하겠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부르나이는 1963년 전후에 근대국가형태를 갖추게 된다. 물론 이 지역의 역사는 한참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나 기록문서의 부족으로 인해 정확히 언제부터라고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은..
과거 인도와 중국의 무역이 있은 이래로 말레이 반도는 일찍이 문명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
초기 무역과 제국들
2세기경 이미 유럽에도 알려질 만큼 이곳 말레이 반도는 금으로 부유한 땅으로 칭송받았다. 인도는 이미 값진 금속과 주석 그리고 아로마 정글 우드 탐색을 위해 정기적인 방문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도는 이곳 말레이 반도에 힌두교, 불교, 왕의 관리 지침과 같은 것들을 소개하면서 종교 문화 사회적 시스템에 막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초기 말레이 반도에서 나름 위대한 제국이 바로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이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남부 수마트라에 기초해서 (현재의 팔람방 근처 어디)무역을 통한 말라카 해협, 자바, 보르네오 남부를 컨트롤 하며 무려 7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통치한다.
그러면서 말레이반도 내 캐다(kedah)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이 번성해졌다. 말레이 반도내 힌두 불교의 복합 사원이 지금까지도 발굴되면서 당시 힌두-불교시대의 기억을 제공해준다.
한편 태국 남부에 자리잡은 리고(Ligor)왕국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자바의 마자파히트(majapahit)와 충돌하면서 결국 수리반자야는 14세기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말라카 제국
말레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서의 멜라카는 파라메사와라(paramesawara)에 의해 건설된다. 힌두교의 변절자인 그는 원래 수마트라 남부 작은 왕국 출신이다. 그는 자바네스 마쟈파히트 제국으로부터 급하게 독립을 선언하다 마자파히트의 원정대에 의해 왕국이 파괴되고 현재의 싱가포르로 도주한다. 그는 이곳에서 부족국가의 수장으로부터 환대를 받지만 8일 이후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통치자임을 선언한다. 템삭은 당시 타이 왕국의 령이었다. 향후 5년 동안이나 그는 해적질과 약탈로 부를 축적해가지만 타이의 분노를 사게 되어 타이왕국은 원정대를 급파한다. 그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정착한곳이 아주 작은 어촌인 말라카. 이때가 1400년... 이때부터 말라카의 말레이시아의 모든 역사를 대변하게 된다.
그러나 파라마사와라는 이곳이 심해를 가진 자연 항구로서의 잠재성을 예견한다. 말라카는 타이로부터의 위협을 막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인식아래 중국에 사신을 급파해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타이왕국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중국은 이를 허락하고 당시 인도와의 해상무역을 하는 배를 정박시킨다. 말라카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의 정확한 중간 지점이었기에 몬순(계절풍)의 변화정도에 따라 이곳에서 기다라고 가고를 반복할 수 있는 곳이다. 해상무역자체가 이곳에서 이루어져서 인도인과 중국인들이 이때부터 상주 혹은 정착을 하게 된다.
초기 이슬람시대.
이슬람이 이곳 말레이시아에 도입된 것은 1303년. 말레이 반도 동해안으로 들어와 아주 빠른 속도로 인디안 무슬림을 통해 전파하고 15세기 중엽 말라카 3대 통치자인 무하라자 모하메드 사하가 개종하게 된다. 그의 아들인 무자파 사하는 술탄이란 이름을 걸치고 영토를 이슬람화한다. 15세기를 경과하면서 말라카는 인도네시아 다도에 이슬람을 보급하면서 이슬람의 중심지로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항구와 경쟁에서 인도 무슬림 상인을 유혹하여 남동부 아시아의 물류중심지로 거듭난다.
한편 남중국해 건너편 부루나이 역시 말라카와 경쟁이 될 만큼의 항구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당시 이 지역의 통치자 술탄은 부르나이를 이슬람 국가로 개종함과 동시에 남쪽으로 멀게는 현재의 사라왁의 쿠칭까지 북쪽으로는 필리핀까지 통치를 하면서 16세기 황금시대를 열게 된다.
포르투칼 식민시대
15세기 유럽은 향신료를 찾아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아라비아 무역상인, 인도 무슬림 상인 심지어 말라카까지 모두 독점하고 공급한 이가 베네치아 상인이었다.
이에 따라 포루투칼은 ‘신, 영광 그리고 금’이라는 당대 사슬을 깨기로 결심한다. 이들의 전략은 리스본에서 말라카로 가는 해상무역 루트를 지배하고자 요새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1509년 포르투갈은 말라카에 입항한다. 그들은 따뜻한 대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무슬림 위원회에 개입함으로써 이후 말라카 술탄은 포르투갈 선적으로 공격하고 19명의 포로로 가두게 된다.
포르투갈은 이를 두고 말라카에 전방위적 공격이 가능한 요새를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삼게 된다. 알폰소가 이끄는 중무장 함대는 말라카로 진입하여 1511년 한 달 만에 말라카 2만여명과 코끼리 부대를 대파한다. 이에 술탄은 그의 왕국을 버리고 피신하여 이후 북쪽의 피락(Perak)지대의 술탄과 남쪽 조호르(Johor) 지역에 술탄왕국의 건설하게 된다.
한편 포르투갈은 즉각적으로 이 지역으로부터 획득한 생산물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고 지역 술탄으로부터 향신료에 대한 독점 계약을 강요한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리스본은 아시아와 무역 중심지로서 베네치아를 대신하게 된다.
포르투갈이 지배한 130년 동안 말라카는 그야말로 잦은 내전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호르로 쫓겨난 술탄은 말라카 수복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말라카 해협에 주둔해 있는 포르투갈 선적을 위협했다.
네덜란드 식민시대
네덜란드는 말레이시아의 도착과 함께 조호 술탄과의 동맹관계를 맺고 조호는 부를 축적해갔다. 포르투갈과 달리 네달란드 동인도 회사는 애초부터 신이나 영광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윤창출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네덜란드는 현재의 자카르타에 본부를 두고 향신료 생산의 술탄들로부터 직접 거래를 협상해갔다.
조호왕국과의 협조아래 네덜란드는 1641년 1월 말라카를 공격하고 길고긴 몇 달간의 포위 공략을 통해 포르투갈로부터 말라카를 수복한다. 네덜란드와 조호 왕국간의 협동아래 조호 지역은 모든 관세로부터 면제를 받고 다른 지역에 있어서는 네덜란드의 철저한 무역규제를 받게 된다. 또한 조호는 자카르타의 minangkabau로부터의 위협을 극복하면서 17세기 말기에는 이 지역에서 아시아에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150년간의 말라카 통치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결코 이 도시의 잠재성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높은 세율은 결국 상인으로부터 다른 항구를 찾게 하였고 자카르타에 대한 집착은 그들이 결국 말라카에 대한 집중투자를 꺼렸다는 의미를 지닌다.
동인도 회사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동인도 회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들은 인도 - 중국간의 해상루트에서 배가 정박할 항구가 필요했다. 1786년 프랑시스는 당시 무인도인 페낭(Penang)지역에 집단 정착지대를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케다(Kedah)의 술탄과 거래를 성사시킨다. 영국의 정책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독점주의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정책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페낭은 성공적으로 번창하게 된다. 그리하여 1800년에는 만 명이 넘는 인구의 페낭으로 바뀌게 된다.
1795년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이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프랑스의 영향이 커질까 두려워 네덜란드의 자바와 말라카를 인수한다. 1818년 나폴레옹 원정대가 대패하고 영국은 물론 ‘포모사’ 요새를 파괴하고 난 뒤,네덜란드 식민지를 돌려주게 된다.
하지만 당시 이 지역의 영국의 통치자인 해군대령 스템포드 라플은 유럽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영국이 남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그는 오래전부터 느껴왔다. 당시 네덜란드로 자바를 재 인계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씁쓸하게 넘겨주게 되고 결국 그는 말라카가 인도-중국 해상무역상에서 매우 중대한 위치를 보유하고 있어 이곳의 정착을 강조하며 동인도 회사를 설득하게 된다.
해상식민지
1819년 라플은 싱가포르에 발을 디디게 된다. 당시 싱가포르는 조호왕국 령으로 지방 통치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조호왕국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 중이었다. 당시 술탄은 첫째 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죽게 되고 둘째가 술탄임을 선언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젊은 술탄과의 협약을 체결하고 영국은 첫째가 진정한 술탄임을 지지하면서 그들과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싱가포르에 대한 무역지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완전한 권리를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당시 새로운 술탄과 지방 통치지와 라플 사이에서 승인되었다.
1824년 두 번째 조약은 술탄에게 왕궁과 현금을 댓가로 싱가포르 전체를 영국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체결된다.
또한 네덜란드는 1824년 영국과 싱가포르를 두 구역으로 양분하여 이윤을 만든다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영국에 대한 저항을 접게 된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각각 분할 식민화하고 2년 후 영국은 페낭, 싱가포르, 말라야를 소유함으로서 사실상 말레이 반도 전체를 연결하는 반도 식민지화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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