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일 목요일

나무와숲에서 생긴 일

요즘 통네 학교 도서관 '나무와숲(이름이 맘에 든다.)'에서 일주일에 한번 2시간씩 도서관지킴이를 하고 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하루에 고작 5~10명이 책을 빌려가는 도서관이라 지킴이로 할 일은 없다. 청소년지킴이와 잘 지내는 일이 어른지킴이가 할 중요한 일이라고 들었다. 그 활동으로 청소년지킴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있다.

내가 당번인 날 청소년지킴이인 아이는 눈썹이 진하고, 말도 붙임성있게 잘하는 아이이다. 첫날은 아무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자리만 지키다 왔고, 두번째날은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부담만 갖다가 결국 가는 당일날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 뽑아 읽어주자 싶어 가져갔는데, 청소년지킴이 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냐고 묻는다. 잉, 아닌데. 몰랐는데. 했더니 당연히 알 줄 알았죠. 지킴이 일지에 서지 목록도 써야 하는데. 이런.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공염불이었네.

나랑 같은 당번인 아이는 책이 싫단다. 그럼 왜 도서관지킴이를 하느냐 했더니 자기는 학교가 좋단다. 초등학교도 인근 벼리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나왔단다. 일반학교에 대해서는 친구들을 통해 들은 게 전부여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다니고 있는 대안학교가 좋단다. 그래서 학교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는데, 도서관지킴이를 구한다고 해서 자원했다고 한다. 그외에서 컴퓨더 관리도 한다고 한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어주어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도서관의 책이 아니어서 펼쳐보지도 못했다. 일지를 살펴보니 박기범의 <문제아> 같은 책을 읽어준 게 보인다.

ㅋ. 내가 가져간 책은 <일본고서점그라피티>라는 일본헌책방에 관한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일본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내부구조도를 그리고 헌책에 대한 의견, 헌책방에서 구한 책 이야기 등을 써 놓은 책이다. 책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하려고 선택한 책인데 물건너 갔다.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 구입해서 갖춰놓고 읽어주어야 할까, 암튼 보류.

그리고 나서 황급히 책꽂이를 뒤져 고른 책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우리나라에서 한비야를 모르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다소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물, 한비야. 역시 그 아이도 알고 있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알고는 있지만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옳거니. <중국견문록> 외에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같은 책이 있었지만, 내가 읽은 책인 <중국견문록>을 골랐다.

하루에 읽어 주는 양은 한 챕터. 책을 읽어 주기 전에 책을 고를 때 어떤 것을 먼저 보냐고 물었다. '차례요.'라고 대답한다. 먼저 저자 약력을 소개하고, 판권을 살펴본 뒤, (머릿말을 읽어주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장을 읽어주었다.

한비야는 44살에 중국어학연수를 떠났다. 단지 전세계 4분의 1이 쓰는 언어라서 배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에서 일을 하려면 중국어가 필요하겠다 싶어 중국어학연수를 떠났다 한다.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외국어 다섯 가지를 마스터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장 "너무 늦게 왔는데요"를 읽어주고 어땠냐고 물으니, 감동적인데요 한다. 실패하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책 잘 읽으시는데요. 이 녀석이, 귀가 뚤리긴 했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다니. ㅋ. 44살이라는 나이에 배낭 하나 매고 1년 어학 연수를 떠날 수 있는 한비야의 용기가 부러웠다. 라오스를 여행할 때 도시 혹은 두메산골에서 '월드비전' 사무실과 '월드비전' 파놓고 간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 자아도취에 빠져 다음에도 이 책을 읽을까 하니, 냉정하게 책도 많은데요, 한다. 그래그래. 알았어, 다음엔 다른 책으로...ㅠ.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명색이 도서관사서라고 앉아 있다가 책 한권을 빌려 왔다. 행여 누가누가 책 많이 빌리나 순위에 들고 싶어서는 절대 아니다. 이 많은 책을 두고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그날따라 눈에 띄었던 창비에서 낸 성석제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뽑아왔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부채부터 해서 꽤나 많은 광고와 판촉물을 날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도 읽지 않았던 책인데.

목록을 보니 우선 <책>이라는 단편이 눈에 띈다. 책읽기보다 책 자체를 좋아하는 나는 책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저절로 그리로 간다. 이 책의 주인공인 '당숙'의 포스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책을 사다 나르는 나의 행태에 불만을 느끼는 통이 통감할 내용이 아닌가 싶어 잠깐 옮겨 본다.


당숙은 책이 많다. 책이 많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달라 열권으로도 많은 사람이 있고 만권도 적은 사람이 있다. 당숙의 기준으로 책이 집안을 채우고 넘치게 되면 많은 것이고 더 들어갈 여우가 있으면 적은 것이다.
당숙에게 책이 많아진 건 이미 3년이 넘었다. 이로 인해 고민스러워진 사람은 당숙이 아니라 당숙모다. 당숙이 이런 일로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많은 책을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이 대목에서 나는 통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더 대범하게 책을 들여놓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당숙모는 3년 전부터 집을 채우고 남은 책은 아파트 지하에 창고를 지어 보관해 왔는데 그 창고마저 비워주어야 할 형편이 되자 이삿짐쎈터에 책을 맡겼다고 한다. 종이상자에 책을 담아 보관해주는 비용은 한달에 십오만원이고 일년으로 장기계약하면 십이만원으로 할인은 해준다.(옳거니)

대략 줄거리는 이처럼 책이 많은 당숙을 둔 조카가 당숙의 책을 맡아주겠다고 나서고 모월모시 그 책을 자기 집으로 옮기는 이삿날의 이야기다. 이삿날 책보다 먼저 조카의 집에 온 당숙은 조카의 집에 있는 잡지 몇 권에 넋이 나가 자기 책 이사는 남의 일처럼 관심이 없고 책만 읽다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표현했을까? 싶은 마음과 함께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이어 이 책의 표제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과 <천애윤락> <욕탕의 여인>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천하제일 남가이>를 죽죽 읽어나갔다.

과연 듣던 소문대로 성석제의 입심이 장난이 아니다. 김원룡이 쓴 <나의 인생 나의 학문>을 읽으며 킬킬 댔을 때 무슨 만화책이라도 읽냐고 놀림을 받았는데, 성석제의 소설 역시 가슴을 후벼파는,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찌질이 루저들의 이야기임에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빅재미를 주고 웃음이 뻥뻥 터진다.

주인공 하나같이 그렇게 바보처럼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도무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있나. 세상의 모든 비극은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읽는 내내 영화 <파이란>의 최민식이 떠오른다. <천애윤락>의 주인공 친구 동환이 이야기를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눈물이 나서 혼났다. 옘병. 나보고 이 책 인물들처럼 살라고 하면 진작 접싯물에 코박고 죽었을 거다. 이런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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