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101130. 여행과 거리두기

오늘 나무와숲에 갔다가 봄비한테 들었다.
요즘 통이 왜 그렇게 시니컬하냐고.

아, 통이 여행을 다녀와서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다, 했더니,

1년 정도 여행을 다녀온 다른 선생이 그러더란다.
일상생활로 복귀하려면 여행을 다녀온 기간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들을 살려 보자 야심차게 학교로 복귀했던 통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펼치기는커녕, 꺼내보기도 전에,
매일같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의, 일, 회의, 일 속에서
옴싹달싹 못하고
그 스트레스를 오롯이 술로만 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에 다가가기
정신없는 직장생활 속 짧은 여행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어렴풋이 긴 여행을 상상했던 게 여행 떠나기 5년 전인 2004년부터였던 거 같다.
왜 일은 한꺼번에 터지는지 복잡한 가정사로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이나 가버릴까 생각하던 차에
통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여행에 대한 꿈은 사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가 아닌 둘의 여행을 꿈꿀 수 있어 좋았다 해야 하나.
둘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자 했던 시기가 2007년이었다.
하지만 우리 여행은 2009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5년 동안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여행을 생각하며,
여행지에서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며 참고 견뎠다.

여행과 마주하기
그리고 2009년 5월 1일 여행을 떠나
결코 그날이 올까 싶었던 2010년 4월 3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하는 동안 힘들고, 재미있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내 인생에 최대로 고민이 단순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어디로 갈까? 오늘은 어디서 잘까?
이 고민만 해결되면 너무나 행복했다.
어쩌다 누군가가 손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여행과 거리두기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통과 나는
적잖이 혼란스럽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방황 아닌 방황을 경험하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에 복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나대로, 통은 통대로.
나는 그나마 통보다는 서서히 시동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도 온갖 스트레스에 빨리 모든 일을 접고 싶다는 생각뿐이고,
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빡세어진 학교라는 전쟁터에
거의 무장해제된 채 떨구어져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통 일병일지도 모른다.

뭐가 문제인가? 치열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우리만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가 힘들었는데,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여행한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돌아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짧은 주말 여행을 다녀오면 주초 하루 이틀 고생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잊고 살았고,
한 열흘 미국이나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면,
시차로 한 1주일 정도 고생하다 다시 바쁜 일상 속에 뭍혀 버렸다.

1년 여행을 하고도 이런데,
2년, 3년, 5년째 여행하는 사람은 어떨까?
10년째 여행하는 사람은 아예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지금은 여행과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기.
나를 잃지 않으면서 이 생활에 적응해 가는 것.
언제쯤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게 될까?
그때가 오면 난 지난 여행을 잊고 생활에 찌들어 살고 있는 건 아닐지?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101126. 금. 치약

며칠 전 치약이 떨어져 남은 게 없나 선반을 뒤졌다.
아무리 봐도 남은 게 하나밖에 없어 치약을 사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5개짜리 치약 세트를 샀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얼마 전 통이랑 마트에 가서
소나무소금치약을 세트로 산 것 같은 장면이 데자뷰처럼 스쳐가는데.
다시 선반을 열고 보아도 소나무소금치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산 치약을 선반에 넣고 나서 보니
소나무소금치약이 무려 6개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아니, 저게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이런 경험이 또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를 달릴 때 팜플로나 시내에서 순례자용 숙소를 찾을 때였다.
지도를 보니 이 쯤인 거 같은데, 기념품 가게밖에 보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방금 내가 지나온 곳,
내가 등을 지고 앞에 있는 기념품 가게를 바라보고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뒷쪽에 있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려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내가 들으려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바로 앞에 있었고,
조금만 여유를 갖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치약처럼 말이다.

요즘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고 퍽퍽했던 게 사실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고 잠을 자면서도 선잠을 자는듯한 느낌이었다.

그저 누구나 쉽게 내뱉는 말처럼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자고 나를 달래기는 쉽지 않다.
카르페 디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심지어 <그만두는 힘>이라는 책의 목차까지 냉장고에 붙여놓고 보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오늘 아침 옴짝달싹 할 수 없는 4호선 지하철 좁은 공간에서
아침에 주머니에 급하게 쑤셔넣고 나온
에쿠니 카오리가 쓴 '絵本を抱えて 部屋のすみに'(그림책을 품고 방 한구석에)를 뒤적거리다
내가 좋아하는 아놀드 로벨이 쓰고 그린 두꺼비와 개구리 이야기가 눈에 띄였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하루하루> 의 <혼자 있고 싶어> 중에서
"난 기뻐. 정말 기뻐. 아침 눈을 뜨면 햇살이 비추고 있어 기분이 좋아.
내가 한 마리 개구리라는 게 정말 기뻐.
그리고 너라는 친구가 있어서."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의 < 꿈> 중에서
두꺼비가 개구리에게 하는 말.
"개구리야." 두꺼비가 말했다.
"난 니가 와 주어서 정말 기뻐."
"언제나 오잖아." 하고 개구리가 말했다.
그리고나서 둘이는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길고 아름다운 하루를 함께 보냈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책장을 덮고
아놀드 로벨이 쓴 개구리와 두꺼비의 따뜻한 우정 이야기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놀드 로벨에 대해 조사하고 그가 쓴 책을 읽고 했던 그 시절도.
아마 6~7년 전쯤 된 것 같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 아놀드 로벨의 책을 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우연히 들고 나온 책에서
좋아하는 것,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발견해서 기뻤다.
그래, 이렇게 단순한 게 나라는 사람인데.
좋아하면, 하고자 하면 뭔가 마구마구 일을 벌리는 게 나였는데.
단점은 싫으면, 억지로 시키면 못한다는 거지만.

삶이 아무리 퍽퍽하다 해도 어느 순간 웃음짓고 있고,
삶이 아무리 행복하다 해도 어느 순간 가슴아프고 힘들어 했던 것 같다.
그조차 느끼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더 불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힘들다 힘들다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보면 여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하자,
기왕 해야 한다면 즐겁게, 즐기며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오늘의 생각.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101120. 행복한가요?

사실 요즘 많이 우울하다.
과연 이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이었던가?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요즘 나는 주 3일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 나간다.
시작은 좋은 어린이 자연생태책을 기획해보겠다는 취지였는데,
시작부터 완전히 꼬여 버렸고, 일의 방향도 애초 생각했던 방향보다 다른 길로 가고 있다.
그 시작이란 함께 일을 하자고 했던 친구가 출근 다음날부터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서
그럼 친구와 함께 일을 해볼까 하고 나갔던 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고,
일의 방향도 기획이 아니라 빨리 적은 돈을 들여 개발할 수 있는
외국 저작물을 찾는 일에 주력을 하고 있다.

이제 슬슬 일을 해야지 마음먹던 시기도 아니었고,
오로지 함께 하자는 친구와 일을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일이 어긋나게 되자 그 마음을 추스리는 것도 많이 힘이 들었다.
마음 추스리는 것도 많이 힘들었지만, 1년 반 이상이라는 시간을 여유롭게 지내다
주 3일 안양에서 상암동까지 출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그동안 여행에서 돌아와 아무 것도 안 하고 지내다
새로 시작한 게 길학교 도서관 나무와숲 주 1회 자원활동이었고,
그러다 의욕이 뻗쳐 시작한 프랑스어 동아리 모임을 하고 있었다.
모두 화요일이니 화요일을 빼고 주 3일을 출근하는 게 뭐 힘들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더 나를 힘들게 한 건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난 나의 의욕과다였다.
친구가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남과 동시에, 나도 자연생태기획을 그만둬야겠다 하는 생각이 컸고,
그 대신이 참에 미루어두었던 내가 하고 싶었던 어린이책 기획을 하자 하는 마음에
다른 곳과 기획을 해보겠다고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다른 곳에 러프한 아이디어를 보냈더니 그중에서 자전거를 기획해 보라고 해서
역시 새로운 의욕으로 가득찼다.
그래,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구나. 내가 그렇게 만들어보고 싶어했던 자전거책을 만들어 보라니.
나의 여행 경험, 그동안 내가 모은 자료, 나의 열정으로
열심히 기획해 가면 되겠구나... 했는데...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만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그렇게 게을러서 엇다 쓰냐고 비웃겠지만,
한 시간 30분 걸리는 출퇴근 거리가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지금은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쪼금 적응도 되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자전거책 조사도 하고 책도 보고, 아이디어도 내야 하고, 기획안도 써야 하는데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아무것도 할 힘이 생기기 않았다.
그럼 주말에 하면 되지 않냐고?
말이 주 3일이었지, 월, 목, 금을 출근하는데,
화요일 도서관자원활동 가고, 수요일 도서관지킴이 모임을 하고 나면
결국 나는 주 5일을 일을 하는 셈이니 주말이면 녹다운이 되었다.
그 부작용으로 무한도전을 본방사수만 하다가, 나중엔 집에 들어오면 의미없이
무한도전을 무한반복해서 멍하니 보는 날이 이어졌다. 본 걸 또 보고, 또 보고.
첨엔 것도 재미있었지만, 나중엔 이게 뭘하는 건지...그러면서도 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 곡기를 끓여먹은 흔적은 오래전으로 사라지고,
예전 내 삶을 직장이라는 악마에게 저당잡히고 생활했던 그때의 악몽이 다시 현실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이게 아닌데.
일단은 이 상황이 뭐가 문제인가? 내가 최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때의 해답은 내가 너무 게으른 거였고,
나의 게으름을 타파하고 밤을 세워서 자전거 기획을 하면 되는구나 하는 거였다.
결론이 여기에 다다르자 나는 더 괴로워졌다.
결국 내가 게을러서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내가 살리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무엇인가?
그러다 보니 회사 일에도 집중이 안 되고, 세상만사 모든 것이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면 모진 것 같아도 그리 모질지 못하고 치열하지 못하고,
밤을 새워까지 기획을 할 의지도 없고,
무엇보다 난 그렇게 살기 위해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게 아니다!

지금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은 도서관 자원활동과 자전거 기획이고,
재미있는 일은 프랑스어 동아리(그놈의 오지랖으로 내가 모임을 주관하고 진행하고 있다)이고,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을 것 같은 일이 자연생태기획인 거 같은데...
1년 반 이상 놀다 온 사람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일은 한다는 건 미친 짓이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떨어내야 해.
도서관 자원활동도 힘들면 이번 학기까지만 하겠다고 하면 될 거고,
프랑스어 동아리도 올해까지만 하면 되니 별 문제 없고,
자연생태기획은 12월까지 계약을 했으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고,
지금 상태에서 부담만 되는 자전거기획을 떨어내야겠다 마음먹었다.
나를 믿고 기획을 해보라고 기회를 주신 분들에게 못하겠다는 말을,
것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건데.......쉽지 않았지만,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용기다 싶어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 그분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무한도전을 끊게 되고,
오히려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참 신기하지....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찼던 상황에서
그 일을 떨어내고 나니 새로운 의욕이 생기다니.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자연생태기획에 몰입하려고 하고 있다.
비록 회사의 방향은 번역물을 찾는 쪽으로 가고 있지만,
난 계속 머릿속으로 어떤 방향으로 기획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다.

요즘 나는 내 주변에서 행복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해서일까? 나는 기쁘다, 나는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겉으로 보아도 안 행복해 보이고,
시골에 귀농해서 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도 시골의 삶도 퍽퍽하다 하지,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을 발견하겠다고 대안교육바닥에서 일하고 있는 통도
이건 미친짓이라고 매일같이 절규한다.
삶의 고단함을 모르는 3~4살 아이들이나 하루하루가 즐거우려나. 슬프다.
어떻게 하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여행을 할 때는 무한도전만 보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무한도전만 보는 건 나에게 행복이 아니었다.
현실도피를 위해 무한도전을 보니 행복할 리가 없지.

현실은 녹녹치 않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더 빨리 변하고, 점점 더 새로운 것만을 원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쉽다.
내가 행복한 길을 찾아 가면 내 삶은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지금 나의 행복이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주변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나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안의 욕심을 버렸다.
행복과 욕심은 동전의 양면 같다.
전에는 돈, 명예, 일에 대한 욕심으로 더러움, 치사함도 참고, 즐거움도 모르고 일했다.
그러나 난 행복하지 않았다.
욕심은 행복이 아닌 불행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겁게 하는 것이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 이기적이라 해도.

나를 비롯한 내 주변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모두 행복한가요?

2010년 9월 30일 목요일

32,000원짜리 일본 여행

나는 헌책을 좋아한다.
나는 헌책방을 좋아한다.
나는 동경 칸다 헌책방 거리를 좋아한다.
나는 동경 하라주쿠 Book Off를 좋아한다.

Metropolitan city 동경을 좋아하지 않지만,
칸다 헌책방 거리와
책과 CD, 만화책을 싸게 살 수 있는 Book Off가 있는 동경은 좋다.

2007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동경에 가서 헌책-주로 그림책을 무려 60권이나 사오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다.
책값은 100엔 하는 책도 있고 1000엔이 넘는 책도 있었다.
얼마치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때 환율이 700원대였으니까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내내 그때 산 60권 리스트라도 정리해봐야지 했었는데,
벌써 햇수로 4년이 흘렀다.
지금도 일본에 가고는 싶지만 환율 1400원이라는 게 꿈도 못 꾸게 한다.

그런데 오늘!
일본 동경 자료수집을 하는 셈치고 신촌 Book Off에 갔다.
2000원짜리 일본 그림책 16권을 32,000원에 샀다.
평소 헌책방에서 사는 책보다 무지무지 많은 양이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헌책방 순례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살 이유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게다 서울 시내로 한번 걸음하기가 영 녹녹치 않은 일이라
떡 본 김에 제사라고 질러버렸다.

그런데 마음이 아주 뿌듯하다.
BooK Off라고 값이 다 싼 건 아니었다.
일본에서 운 좋으면 100엔이면 살 수 있는 책들이 여기서 10000원 넘게 파는 것도 있었고,
우습게 같은 책인데, 어떤 권은 4000원, 어떤 권은 2000원,
어떤 권은 2000원, 어떤 권은 8000원 막 그랬다. 잘 봐야 한다.
헌책으로도 복음관 책이 많았는데, 난 복음관 책을 좋아한다.

오늘 산 책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책이 많다.
얼레벌레 12월까지 석달 동안 유아자연생태전집 기획일을 하게 되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일주일에 세번 나가기로 하고,
오늘이 두번째인데, 나보고 일을 하자고 했던 친구가
갑자기 승진이 되어 다른 팀으로 가버리게 되었다. 이런 개나리 십장생이 있나.
잠시 욱해서 그 친구가 안 하니 나도 안 하겠다 그 친구에게 이야기했으나,
좀더 생각해 보니 그 친구가 아니어도 그 일을 하는 게 좋겠다는 현실감을 찾게 되었다.
물론 개발까지는 아니고 기획까지만.

계속 마음만 먹고 있었던 어린이책 기획이라는 게 널브러져 있으니 쉽지만은 않았다.
뭐 이 일은 전집이니까, 이쯤에서 이 일을 그만두고
단행본 기획을 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이 일을 그만둔다고 단행본 기획을 하지 않으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참에 공부도 하고, 좋은 책도 많이 보고, 돈도 벌고
1타 3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해서 오늘 일본 자료 수집을 간 셈치고 Book Off에서 책을 잔뜩 사오게 되었다.
다시 살펴보니 역시 잘샀다는 생각이 든다. 통은 눈을 부릅뜨고 싫어하겠지만...

만원버스에 시달리고 지하철 갈아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서
오전엔 냉방에 오후엔 난방에 건조한 사무실에서 비비다가
북오프까지 가서 책꽂이를 뒤지다 보니 눈이 심히 아프고 피곤하다.

그래도 기분이 기분인지라 오늘 산 책 리스트를 올려본다.

프뢰벨관 자연
<낙엽의 밑에는> <しぜん・おちばのしたには>

<펭귄>
<강>
<얼음편>
<어떤 얼굴?>
<동물들의 집>
<매실>

복음관 도감라이브러리
<ちょう> 大島 進一

<ぼくの家ができる> 


<海辺のずかん>(해변도감) (福音館のかがくのほん)
海辺のずかん (福音館のかがくのほん)

にわさきのむし しゃがんでみつけた(정원의 벌레, 웅크리고 앉아서 발견) (かがくのとも傑作集)

にわさきのむし しゃがんでみつけた (かがくのとも傑作集)

ぼくらは知床探険隊(우리들은 시레토코 탐험대)

시레토코는 홋카이도 지명
ぼくらは知床探険隊 (絵本の泉)

はしのもちかた―おかあさんといっしょに

젓가락 쥐는 방법-엄마와 함께
はしのもちかた―おかあさんといっしょに

新しい単位―カラー版 (扶桑社)

새로운 단위.
新しい単位―カラー版 (扶桑社サブカルPB)

ガジュマルの木の下で―26人の子どもとミワ母さん (岩波フォト絵本)

가주말 나무 밑에서-26명의 아이들과 미와엄마
(26명의 아이들이 HIV에 감염된 고아란다...개인적으로 아주 만족)
ガジュマルの木の下で―26人の子どもとミワ母さん (岩波フォト絵本)

2010년 9월 18일 토요일

NON TI MUOVERE - MUSIC VIDEO

GEGEN DIE WAND ( HEAD-ON) - HQ Trailer ( 2004 )

아키코가 갔다

이틀 밤 자고 오늘 하루 종일 수다 떨다 돌아갔다.

다음 주 화요일이면 11개월 만에 일본행 비행기를 탄다.
재미없으면 일주일만 있다 가야지 하고 온 한국인데,
생각보다 너무나 재미있어 두 달 가까이 머물렀다 한다.

함께 있는 내내 일본에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아키코를 태워 보내며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올 1월초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만나 며칠을 함께 보냈고,
3월 태국 방콕에서 다시 만나 며칠을 함께 보냈다.
5월에 방콕에 들렀을 때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인도인지, 라오스인지 갔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일본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에 들렀다며 7월말쯤 메일로 연락을 해왔다.
마침 우리가 8월 초에 이사하니 이사한 뒤에는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답변을 했고,
짐 정리도 되지 않은 이사한 바로 다음날 놀러와 오랜만에 술 한잔 할 수 있었다.

아키코도 연락을 잘 안하는 스탈이고, 나 역시도 그렇고,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궁금해 하고 있던 차에
9월 10일에는 일본에 돌아가야 한다며 8월 말쯤 놀러가도 되냐고 전화가 왔다.
마침 그때 급하게 넘겨야 할 일이 있어 며칠 뒤가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전날 올 수 없게 되었다고 문자가 왔었다.

그래서 일본에 돌아갔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월요일에 다시 아직 한국이라며 전화가 와서 다행이라며 수요일에 보자했다.

수요일에 놀러와 같이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고,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미적미적거리다 뭐할까 술을 마시기는 뭐하고
아침부터 수도관 공사를 하는 바람에 하루종일 소음에 시달리다
통네 학교 도서관이나 가보자 하고 4시쯤 함께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서 저녁도 얻어먹고 도서관에서
아키코는 아키코가 흥미로운 책을 읽고, 나는 나대로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9시. 이젠 공사가 끝났겠지 하고 돌아왔더니 아직도 공사중.
가방을 놓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고 다이소에 가서 잡화를 구경하다
너무 피곤해 돌아오니 공사는 일단 정리가 된 상태.

아키코가 오기 전날도 학교 선생님이 찾아와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신 상태였고,
전날도 아키고와 2시 넘어까지 술을 마셔 너무 피곤해 오늘은 일찍 자자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키코는 잘 시간을 놓쳐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잤다고 한다.

아침 8시 30분쯤 통 출근하는 걸 보고 다시 잠이 들어 12시 30분쯤 일어났는데,
아키코가 벌써 일어나 있었다. 늘 오후 2~3시까지 잔다고 했는데 일찍 일어났네.

서둘러 밥을 해서 늦은 점심을 먹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시고
각자 책을 보다가, 가족 이야기, 한국 미친 영어 교육 이야기, 일본 사교육 이야기,
아키코 여행 이야기-역시 여행하기엔 태국이 최고다 등등- 한국 술 문화,
한국 남자와 일본 남자와의 차이점,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
선물을 뭘로 사갈까.. 등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저녁 8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

마지막으로 짜파게티를 끓여먹고 싶었는데, 1개밖에 없어서 진라면 2개를 끓여
김치와 먹으면서 한국사람들은 라면에 밥 말아 먹는다니
그럼 한국식으로 밥말아먹겠다 해서
밥말아주고. 그렇게 2박 3일을 있다 갔다.

아키코가 돌아가고 나니,
아키코가 한국에 있는 동안 시내에서도 만날걸,
내가 먼저 연락도 할걸,
맛있는 것도 좀더 해줄걸
-하다못해 짜파게티라도 한 개 더 사다 끓여줄걸-후회가 된다.

귀찮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잘 지내겠지 생각하며 미루다
막상 아키코가 떠나가니 이제 언제 다시 만날까 아쉬움이 밀려온다.
아마 일본보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만나기가 더 쉬울 거다 이야기는 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한국의 겨울을 보고 싶다고, 아마도 겨울쯤 다시 올 것 같다며 갔다.
무사히 잘 돌아가길 바라고, 또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길 바랄 뿐.
카메라도 고장나서 사진도 찍지 못했는데...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
.

잠이 안 와 영화라도 한편 볼까 곰플레이어에 들어가 본 무료영화 <빨간 구두>.

영화에 대해 아는 건 전무했지만,
페넬로페 크루즈라는 이름 일곱자와 평점 8.7을 보고 밀양 대신 선택한 영화.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45분.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지만,
영화를 본 느낌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
천박하게 보이기 위해 앞니까지 만들어 넣었는지 끼우고
걸음걸이까지 무릎이 닫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걷지만
페넬로페 크루즈는 정말 예쁘고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
감독 겸 남자 주인공이었던 세르지오 카스텔리오라는 사람
참 이기적이면서,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가면서도
아내 아닌 또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참 답 안 나오는 이기적인 남자.
그럼에도 참 자상하고 따뜻하고 능력있고 잘생기기까지 하다는 생각,
감독 겸 배우라는 점에서 독일에서 본
'Gegen die Wand(미치고 싶을 때)'에서 cahit tomruk을 맡은 Birol Ünel과 비슷하다는 생각,
unhappy ending 면에서도 비슷하다 할 수 있으려나...

기욤 뤼소의 <사랑하기 때문에>에 나오는 행방불명된 딸을 찾아
부와 명예를 포기한 정신과 의사 마크와 비슷하다는 생각.

새벽 4시. 자야 하는데 잠이 오려나.

2010년 9월 5일 일요일

내 인생의 책

가끔 네이버의 '지식인의 서재'에 들어가 본다. 기억에 남는 서재는 박찬욱, 이적, 김제동, 장진...ㅋ. (모두 대중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네. )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보다는 글쓰기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책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것 같긴 하다.

재미있는 건, 아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음악을 하는 사람이건, 패션디자이너이건, 영화감독이던, 사진작가이던 모두 책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황제'를 찍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도 마지막 황제 '푸이'의 자서전을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도 넓게 파야 깊게 팔 수 있다며,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 영화 관련 책을 100권 읽는 것보다 영화 책 10권, 소설책 20권, 시집 10권, 자연과학서 10권을 읽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나도 그말에 동의한다. 책 이라는 게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얻어 걸리는 것도 다르겠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읽다 보면 씨실 날실처럼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서재 이야기, 그들의 책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이 추천하는 책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을 발견하면 흐믓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읽지 않은 책들, 읽었어야 하는 책, 읽었으면 하는 책, 읽어야 할 할 책들이다.
김제동은 아랭드 보통 책을 많이 추천했고, 이적은 나처럼 빌 브라이슨을 좋아하나 보다. ㅋ.

나도 내 인생의 책 100권을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

내 인생의 서재란? 발바닥 땀나게 돌아다닌 나의 콜렉션? 나의 지적 호기심의 창고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내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어떤 책일까 ?

1. <나의 인생, 나의 학문> 김원용, 학고재
2. <허삼관 매혈기> 위화, 푸른숲
3.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동아일보
4. <무진기행> 김승옥, 문학동네
5.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6. <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7. <알도> 존 버닝햄, 시공주니어
8. <나무는 좋다> 마르크 시몽 그림, 제임스 메이 우드리 글, 시공주니어
9. <천재 유교수의 생활> 야마시타 가즈미, 학산문화사
10. <세계의 어린이> 웅진(일본 카이세이샤)
11.<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뤼소
12.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다치바나 타카시, 청어람미디어
13.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2010년 8월 27일 금요일

[소박한 책장]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

오랜만의 포스팅이다. 잘 지내고 있다.
슬슬 게으름으로 복귀하고 있는 중이다.

아주 잠깐 동안 내 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설렘에 손님맞이 준비, 집안정리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귀차니즘 요요현상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도 20개월을 붙어 지내던 통이 학교로 복귀함에 따라, 혼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게으르면서 간소한 생활로 돌아서고 있다.

매일같이 내리는 국지성 폭우도 한몫하는 것 같다. 뭔가를 해야지 싶으면 어느새 온몸이 끈저끈적해지는 신호를 보내며 이내 소나기를 퍼붓는 이 날씨. 예전에도 한국 날씨가 이랬는지 왜 이리 비를 퍼붓는지 궁금하다.

그나마 1주일에 한번 나무와숲에 가는 것으로 게으름을 극복하고 있다. 나무와숲에 가기 전날인 월요일까지 까라져 있다가, 나무와숲에서 돌아온 화요일은 잠깐 의욕에 차 있다가 서서히 하향곡선을 탄다. 그러려니.

이번 주 화요일에는 나무와숲에 가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불르는 숲>을 빌려왔다. 시니컬한 상상의 세계 '멋진 신세계'를 읽다 다소 당황스러워 펼친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 4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3일 만에 다 읽었다. 400페이지라 해도 어렵거나 무거운 내용이 아니니 누구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금방 읽을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으로 알려진 빌 브라이슨. 여행 중 헌책방에서 빌 브라이슨의 책을 워낙 많이 발견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일까, 내용일까 심지어 영어로 된 책이라도 사서 볼까 유혹에 빠졌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나무와숲에도 소장하고 있어 펼쳐 보긴 했는데, 과학에 대해 문외한이며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무리였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책이 <나를 부르는 숲>이었다. 원제는 'A walk in the woods'이다. '숲에서 걷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숲에서 걷고 또 걷는 이야기이다.

자연과 과학의 해박한 지식과 넘치는 유머로, 18kg 배낭을 메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산을 오르내렸을 그의 고통에 대한 안쓰러움보다 시종일관 킬킬거리며 읽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 20년 동안 기자 생활을 마친 빌 브라이슨은 고국에 도착해 뉴잉글랜드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다.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길은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라는 길이었고,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리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라 한다.

흔히 '산티아고'로 알려진 '순례자의 길'이 프랑스 남부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서쪽 끝 '산티아고'까지 850km에 이르는 길이니 그 4배에 이르는 길이다. 세상에는 이런 저런 사연이 많은 길이 참 많은 것 같다.
빌 브라이슨은 3400여 킬로미터 대장정을 떠나기 위해 여러 가지 구실을 찾았다.

14쪽.
게을러 터졌던 수년간의 생활을 바로잡을 기회다. 20년간 해외에서 생활하다 돌아왔으니 조국의 장관과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명분도 있지 않은가. 또는 거친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것도 유용한 일이다.
가야할, 더 설득력 있는 이유들이 있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세계의 온대지방에서 가장 다양하고 풍성한 수종을 자랑하는 위대한 숲의 하나인데,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그 길고 웅장하고 시종일관 힘들고 때로는 아름다울 그 길을 혼자 떠난 건 아니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다(Neither Here nor There)>에서 어릴 때 유럽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 카츠와 함께 길을 떠난다. 서로에게 잔뜩 화가 난 채 여행을 시작했다가 서로를 경멸하면서 여행을 끝낸 뒤, 25년 동안 고향을 찾을 때 서너 차례 외에는 본 일이 없었던, 삶이 이러하듯 이름만 친구로 남아 있늘 뿐 인생의 길이 명확하게 갈린 그 친구 '카츠'와 함께 말이다.

아무리 그 길이 곰이 설치고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맞지 않아 보이는 친구와 떠날 수 있을까? 그만큼 떠나고자 하는 의욕이 분기탱천하고 적절한 동반자가 나서지 않을 절박한 때에는 그렇게도 되나 보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이가 아니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적어도 그와 함께 여행을 한 적은 있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부분과 나만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본다.

19쪽.
끝에서 끝까지 종주하려면 적어도 5개월이 걸리고 500만 번의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23쪽.
"데이브, 끈도 안 주고 방수도 안 되는 배낭 하나에 250달러나 내라는 말씀이야?"
-트레일 종주를 계획하고 빌 브라이슨은 등산용품을 사러 아웃도어매장에 간다. 거기서 생판 듣도보도 못한 온갖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점원과 장시간 용품들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고 등산객이 아닌 원정대에 가까운 물품을 사게 되는데, 그 물품들 값이 엄청나다. 기능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하나를 사면 끝나는 게 아닐 또 하나를 사야 된다는 것에 거품을 문다.

53쪽
3천 360킬로미터의 트레일 전 구간과 보조 트레일, 나무다리, 대피소, 표지판 등은 모두 자원봉사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지구상에서 자원봉자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최대 규모의 사업으로 뽑힌다. 또, 영예롭게도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이야기를 읽으며 산티아고와 요즘 한국에서도 한참 인기절정인 제주도 올레길이 떠올랐다. 산티아고는 비싼 유럽 물가에 비해 '알베르게'라고 하는 순례자용 숙소가 있어 하루에 3~7유로만 내면 하룻밤을 잘 수 있다. 뜨거운 샤워는 물론이고, 부엌도 이용할 수 있어 운이 좋으면 누군가가 남겨 놓은 스파게티, 토마토, 양파, 감자 등을 이용해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다. 사설로 개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도 많지만, 무니씨팔 municipal이라고 시청, 또는 수도원에서 기부로 운영하는 알베르게도 많다. 알베르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호스피탈레'라고 하는데 모두들 산티아고를 몇 번씩 종주하고 그리고도 모자라 알베르게 '호스피탈레'로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이다.

난 아직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을 가보지 않아서 그 길이 어떤지 모르겠다. 일반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숙소로 도미트리(도미트리가 좋은 게 아니라 싸니까.)도 있고, 값도 싸다고 들었다. 그런 길에 개인이 욕심을 채우려는 배부른 자들이 숙박업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시립이나 도립으로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나 캠핑장, 저렴한 음식점들이 많았으면 좋겠고, 자원봉사자들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54쪽.
이 광활한 세계로 가는 가장 가까운 관문 도시인 애틀란타에서 하루에 한 번 있는 기차를 트거나 두 번 있는 버스를 타고 게인즈빌까지 가야 하고, 거기서 다시 64킬로미터를 가야 트레일 출발점에서 11.2킬로미터 떨어진 주립공원까지 갈 수 있다.
-지은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접근성이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산티아고는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에 대해 몰랐을 때는 시작지점이 생장피르포르인가 보다 했는데, 보르도 근처에서 프랑스 한 젊은 순례자를 만났다.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은 잘 알려진 길이 4가지나 있고 포르투갈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도 있었다. 우리도 파리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남하했는데, 파리도 프랑스 순례자의 길 루트라는 걸 알았다면 그때부터 '알베르게(프랑스에서는 '쥐뜨'라고 한다)'를 이용하면서 가도 좋았을 걸 싶다.
산티아고로 이르는 길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작하는 길은 프랑스 남부 '생장피르포르'이다. 대부분 파리에서 TGV를 타고 바욘으로 이동해 바욘에서 생장피르포르로 가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도착해서 생장피르포르에서 하루이틀 보낸 뒤 길을 떠난다. 아쉬운 건 선진국이라고 하는 프랑스가 교통수단의 선택권이 별로 없다는 거다. 우리만 해도 서울에서 부산을 갈 때 KTX도 있고, 새마을호도 있고, 무궁화호도 있는데, 프랑스는 어떤 구간은 TGV밖에 없다. 어디까지 낮은 등급을 타고 가다 어떤 구간-주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구간-은 TGV만 이용해야 한다. 이해가 잘 안 간다.
59쪽
등산할 준비는 끝났다. 비록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린 날들은 아니었지만, 수개월 동안 이날을 위해 기다려 왔다. 저기에 뭐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미 전역에서 사람들은 출근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회사를 나가고 있고, 교통 체증과 매연에 시달리고 있는데, 나는 숲 속을 걸으려 하는 것이다. 도전하려는 의지가 불끈 솟구쳤다.

61쪽.
배낭을 둘러메자 무게 때문에 뒤로 휘청거렸다.-이걸 끄덕없이 들려면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68쪽
그가 배낭에 매달아 놓았던 모든 물건들을 절벽 너머로 집어 던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뭘 버린 거야?"
나는 놀라지 않은 척 애를 쓰며 물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무거운 것들...... 페퍼로니, 쌀, 흑설탕, 스팸...... 몰라, 뭘 버렸는지. 하여튼 많이. 제기랄."
카츠는 자신이 생각했던 트레일이 아니란 듯, 마치 배신이나 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가 생각했던 그런 트레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길을 떠나기 전 호기 좋게 다 필요할 것처럼 바리바리 짐을 챙겼다가, 배낭의 무게에 짓눌려 하나둘 버린다. 산티아고의 첫번째 관문이라 해야 할까 첫날부터 아주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 생장피르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탔던 우리도 하루종일 24km를 업힐을 하고 1km 다운힐을 해서 론세스바예스라고 하는 중세 수도원에 도착했다. 자전거에 짐을 달고 업힐을 하는 나도 정말 힘이 많이 들었다. 아니 이번 자전거여행에서 가장 힘든 코스였다. 산 하나를 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경험도 없고 감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힘든 코스가 간혹 있었지만 피레네 산맥을 넘었는데 못할쏘냐 하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배낭을 메고 걷는 순례자들은 이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자신의 짐의 일부를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 두고 간다. 그 후로도 이 과정이 많이 반복되지만, 특히 이곳에 유독 두고 가는 짐이 많은 건 호된 고식을 치른 뒤 겸허하게 만드는 필수 코스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스페인 가이드북도 놓고 가는 사람도 많다.

84쪽
모두가 다른 보속과 다른 간격으로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하루에 서너 번씩은 등산 동료들은 마주칠 수 있다.
특히 전경이 탁 트인 산마루나 깨끗한 물의 시냇가, 무엇보다 표면적으로 일정하지만 실제는 항상 그렇지 않은 간격으로 나타나는 대피소에서 마주치곤 한다. 야간에 대피소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면 서로에 대해 좀더 알게 된다. 그러면 어느 새 연령층도 다르고 직업이나 성도 다르지만 같은 날씨, 같은 불편함, 같은 경치, 메인주까지 종주하려는 자기 중심적 충동을 공유하게 되어 서로를 동정하는 느슨한 연대감이 생기고 친근한 한 무리의 일원이 된다.

85쪽
대부분은 침묵을 사귀어 친구로 삼았다.
가만히 누워서 기묘하게도 명료하고 분명한 밤 숲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바람과 나뭇잎이 안달하면서 내쉬는 한숨과 나뭇가지의 지루한 신음, 끊임없는 중얼거림과 살랑거림에 마치 전기가 나간 회복기의 환자 병동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는 일어나 추위에 다시 진저리를 치고 손을 비비면서 말없이 우리의 사소한 일상, 배낭을 싸서 메고 모든 게 뒤엉킨 거대한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났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유럽의 어느 숲,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어느 숲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던 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누가 와서 가라고 하면 어쩌나, 불량배가 시비를 걸면 어쩌나, 혹시 야생동물이라도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모든 게 다 기우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이 몰려와 금세 잠이 들었다. 독일을 여행할 때 브레멘에서 함부르크로 가는 길이었나 한번 기찻길 옆에 텐트를 치고 잤는데, 심지어 그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책길이었다. 지나가면서 우리를 쳐다보긴 했어도 다른 데로 가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밤새 지나가는 기찻소리가 10번 정도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도 아주 잘 잤었지.

86쪽.
나는 살다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과 얼마간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게 신의 섭리라는 것을 안다.

89쪽.
군 부대에서 영화 상영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등짝을 보여 주고야 말았다.

91쪽.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의 백미가 상실에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모든 경험이 바로 스스로를 철저히 일상생활의 편리함에서 격리시키는 것, 그래서 가공 처리된 치즈나 사탕 한 봉지에 감읍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코카콜라 한 잔에 마치 처음 마셔보는 음료수인 것처럼 넋이 나갔고, 흰 빵으로 거의 오르가슴을 느낄 뻔했다.
-1년 여행 하는 내내 지금 뭐가 먹고 싶은지 wish list를 생각해 보고 또 생각했었다. 그중 상위권이 짜파게티, 곱창볶음, 잡채, 시원한 냉면이었다. 유럽을 여행할 때는 대도시를 지날 때면 아시안샵에 가서 짜파게티와 라면을 10개 사서 항상 쟁기고 다니다 사이가 안 좋아지거나 할 때 화해의 상징으로 소중하게 음미하며 끓여먹었다. 당면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아이템 중 하나인데, 동남아를 여행할 때는 먹을 수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냉면은 동남아가 더운 나라임에도 얼음 자체를 먹으면 먹었지 우리처럼 시원한 육수에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면이 없어서 너무 먹고 싶었던 음식이다. 방콕 카오산에 도착하자 마자 사먹은 음식이 거금 160바트-우리 돈으로 6,400원. 길거리에서 파는 태국 보통 면요리가 30바트, 1,200원하는 걸로 치면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를 준 비빔냉면, 물냉면이었다.

96쪽.
우리는 전날 한 것을 똑같이 되풀이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똑같은 종류의 산봉우리를 넘고 똑같이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서 똑같이 끝없는 숲을 통과해야 했다.

117쪽
발로 세계를 재면 거리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1킬로미터는 머나먼 길이고, 2킬로미터는 상당한 길이며, 10킬로미터는 엄청나며, 50킬로미터는 더 이상 실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삶은 굉장히 단순하다. 시간의 의미는 멈추었다. 어두워지면 자고 밝아지면 일어난다. 그 중간은 그냥 중간일 뿐이다. 너무도 훌륭하지 않은가.
이젠 어떤 약속이나 의무, 속박, 임무, 특별한 야망도 없고 필요한 것은 눈곱만큼도 없다. 당신은 마음의 격렬한 동요를 거쳐 더 이상 어떤 자극이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탐험가이자 식물학자였던 윌리엄 바트럼이 표현한 대로 '투쟁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권태의 시간과 장소에 놓인 존재가 된다.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저 걸으려는 의지뿐이다.

199쪽.
첫날에는 등산이 끝날 무렵 자신이 조금 지저분해졌다는 것을 의식한다. 다음 날에는 지저분해졌다는 게 불쾌해진다. 그 다음 날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다음 날에는 지저분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다. 배고픔도 역시 규정된 단계를 따른다. 첫날 밤에는 국수를 갈망한다. 다음 날 밤에는, 배는 고프지만 국수가 아니길 빈다. 그 다음 날 밤에는, 국수를 먹고 싶지 않지만 뭔가는 먹어야 한다는 걸 안다. 그 다음 날 밤에는, 전혀 식욕을 못 느끼지만 그냥 먹는다. 왜냐하면 그게 그 시간에 내가 해 오던 일이니까. 왜 그렇게 되는지 나로선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그렇다.
-집을 떠나면 모든 게 고생스럽고 일상적인 것들이 사치스러운 바람이 된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땀을 바가지로 흘리면서 1주일 가까이 씻지 못하고 고작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고 자는 날도 많았고, 세 모금의 물로 이를 닦았다. 웜샤워라는 것이 크나큰 사치였고, 하도 텐트를 치고 자다 보니 사방이 벽으로 되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자는 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날마다 끓여먹던 스파게티는 질리지가 않았다. 배가 고파서였는지 라면스프를 넣고 스파게티 라면만 끓여먹어도 너무 맛이 있었었다.
여행이란 굳이 일부러 힘든 여행을 선택하지 않아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래도 힘들어지는 여행을 다시 떠나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243쪽.
다음 날 오전 늦게 나는 카츠와 코놀리보다 너무 앞서 갔다는 느낌이 들어 가파른 언덕 사이에 비밀스럽고 요술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넓고, 오래된, 매혹적인 숲 속의 빈터에서 멈추었다. 숲이라면 이랬으면 좋겠다는 것들이 여기에 다 있고-키 크고 위엄있는 나무들이 햇빛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층이 줄 서서 올라가고, 두터운 이끼가 바닥에 깔린 시내도 꾸불꾸불 흘러가고, 찬 공기가 나른하게 녹색의 고요 속을 떠다녔다-나는 야영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곳임을 의심치 않았다.

377쪽.
'셔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8달러만 내면 숙박과 저녁, 아침 식사를 제공받을 뿐 아니라 샤워시설과 세탁기, 응접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키스와 펫 셔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데 20년 전 키스가 배고픈 등산객을 데려와 대접하고 이 등산객이 얼마나 잘 대접받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다소간 우연히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셔의 집'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기 바로 전에 우연히 들르게 된 알베르게 같은 곳이었는데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좋아 계속 그곳에서 살면서 순례자를 위한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두할데 아저씨였다. 제대로 된 방에서 자고 아침식사까지 하려면 얼마간의 돈을 내야 하지만 컨테이너 같은 곳 침대에서 자거나 캠핑카에서 자면 돈을 따로 안 받고 얼마간의 기부만 하면 된다고 했다. 해서 처음으로 캠핑카 안에서 자볼 수 있었다. 우리가 버너를 이용해서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하자 식당 부엌을 이용하라고 해서 끓인 라면을 조금 덜어 드리기도 했다. 인상이 좋으신 두할데 아저씨는 불어-영어 사전을 펼쳐가며 요즘엔 한국인이 보꾸보꾸(많이많이) 온다며 왜 그런지 궁금하다...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우리와 나누었다. 그 고마움을 그집 아침식사를 사먹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아무리 풍경이 좋아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한 기억을 선사하진 못한다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411쪽.
나는 트레일이 지겨웠지만 여전히 이상하게도 그것의 노예가 되었고, 지루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았지만 불가항력적이었으며, 끝없이 펼쳐진 숲에 신물이 났지만 그들의 광대무변함에 매혹되었다. 나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싶기도 했다.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고 텐트에서 자고 싶기도 했다. 봉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했고, 다시는 봉우리를 안 보았으면 싶기도 했다. 트레일에 있을 때나 벗어났을 때나 항상 그랬다.

415쪽.
물론 아쉽다. 캐터딘까지 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비록 나는 언젠가 갈 거라고 다짐한다고 해도. 곰이나 늑대를 보지 못한 것도, 느릿느릿 소리 없이 뒷걸음치는 자이언트도룡뇽을 보지 못한 것도, 살쾡이를 쉬이 하고 쫓아내거나 방울뱀을 피해 옆걸음치지 못한 것도, 놀란 멧돼지를 맞닥뜨리지 못한 것도 아쉽다.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살아남을 수 있다는 서면 보장만 있다면-정면으로 죽음과 대면하고 싶다. 어쨌든 많은 경험을 축적했다. 텐트 칠 줄도 알게 되었고, 별빛 아래서 자는 것도 배웠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자랑스럽게도 몸이 날렵하고 튼튼해졌다. 삼림과 자연 그리고 숲의 온화한 힘에 대해 깊은 존경을 느꼈다. 나는 전엔는 미처 몰랐지만, 세계의 웅장한 규모를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는 있는 줄 몰랐던 인내심과 용기도 발견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친구를 얻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용즘 산을 쳐다볼 때마다 나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도려낸 화강암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라본다.
우린 3천520킬로미터를 다 걷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게 있다. 우린 시도했다. 카츠의 말이 옳았다. 누가 뭐래도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
-이야기를 읽기 시작할 때는 빌 브라이슨이 친구 카츠와 함께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했구나 생각했는데, 읽어나가면서 결국 그들이 종주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글이란 완주한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 역시 글재주가 좋은 사람이 쓰는 거라는 것과 종주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한 사람이 몇 천 명은 될 텐데 그들이 다 책을 쓰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 더 의미가 있는 건 종주를 하지 않아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통과 나의 의견이 늘 첨예하게 갈리는데, 빌 브라이슨 식으로 보자면 나에게는 1년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통에게는 더 많은 거리를, 하루에 더 멀리 자전거를 타고 가지 못한 것이 불만족스럽고 동남아 특히 라오스를 자전거로 여행하지 못한 것이 불만인 것이다. 이는 아마도 남북한이 통일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견해 차이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 자전거를 타고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여행했고, 평생 해야 할 캠핑을 이번 여행에 다 한 것 같아 내가 대견하고 내 여행이 소중할 뿐이다.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첫 출근

오늘 통이 돌아와서 첫 출근을 했다.
그전에도 계속 학교에 들락날락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첫 출근인 셈이다.
내가 출근하는 것보다도 더 설레는 건 왜일까?

배낭 메고, 우산 하나 들고 걸어갔다. 발걸음도 가벼워보인다.

왕복 3시간 반 거리가 왕복 20분으로 획기적으로 줄었다.
새벽에 들어온 날들은 제쳐두고라도
이른 아침 잠도 덜 깬 채 지하철, 버스, 택시에 시달리던 날들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다.
망원동 합정동에 살면서 내가 편하게 지냈던 날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는데...

아침도 먹고, 커피까지 한잔 마시고 갔다.
뒷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한껏 여유로워진 시간을 술을 마시고 부족한 잠을 자는 시간으로만 보내지 말고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면 잔소릴일까? ㅎㅎ

1년 3개월 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 붙어 있다시피 했었는데,
이제 통은 자신이 선택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갔다.

나는?
통을 깨워 함께 밥을 먹고 밀려드는 잠을 참지 못하고 비몽사몽 잠을 자다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보니 어느덧 4시다.

이제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살림놀이에 빠졌다.
생활의 달인 흉내를 내고 있다.
인터넷, 요리책을 뒤져 밑반찬도 만들고 수납요령 책도 보고,
부추를 사다 김치도 담그고 나름 재미있다.

아마도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활이 그리웠나 보다.
산청에 다녀오면 나도 보리처럼
장아찌도 담그고 반찬도 다양하게 해먹어야지 싶었는데....ㅋ.

양배추를 사다 반통을 잘라 대부분은 젓갈을 넣고 김치를 담그고
일부를 남겨 양배추 피클을 만들어보았다.
거기에 백미는 청양고추.
청양고추가 들어가니 맛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ㅋㅋ.
아마도 통은 싫어할 거야.
통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말았네.
그래도 통을 위해 케첩을 사왔으니,
통이 좋아한는 소세지를 기름에 튀겨 케첩을 뿌려줘야겠다^^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1년 3개월만에 새로운 보금자리로...

보금자리 하니 햇살론이 떠오르네.

1년 3개월만에 새로운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1년 여행이었다지만,
시작과 준비, 마무리를 하는 데-마무리는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여행 전 5개월, 여행 후 3개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희망사항이라면 여행 정리를 하기 전에
다시 긴 여행을 떠났으면 하는 거.

시댁에서 지내던 3개월은
아마도 앞으로 내 삶에 적지않은 큰 의미를 남길 것 같다.
우리 어머니 조칠선 여사님에 대한 무한한 은혜를 느꼈으며,
아침마다 우리가 자는 방에 들어와 우리를 살펴보던 강아지 촐랑이에 대한 그리움.

5분만 걸어가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것 같은 안양천,
따분하기 그지 없는 무더운 여름 나름 재미를 붙여주었던 석수도서관,
1분만 가면 나오는 박달시장, 기업은행, 국민은행...

애꿎은 어머님이 때아닌 시집살이를 하셨지만,
마치 돌아가신 엄마가 환생하신 것 같은 따뜻한 엄마의 마음을 느끼던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게, 북어조림, 비빔국수, 새콤한 파무침,
직접 키우신 토마토에 매실을 넣어 만들어주신 토마토 주스까지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살아야겠다.

우린 결혼한 지 만 5년인데, 벌써 5번째 이사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사정들로 그렇게 되었다.
이번에 이사한 곳에서는 한 5년만 눌러살았으면 좋겠다.

이번 이사한 곳은 통네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통은 학교로 복귀했다는 말이다.
살짝 겁을 내고 있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리라 믿는다.

5번 이사를 하면서 이사하기 전에 이사할 집을 찾아가
청소도 하고 가구 배치 등을 어떻게 할지 들러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이사 때 그렇게 할 일이 많은데도 어떻게 포장이사 하루만으로 끝내고 살았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대충 정리되지 않은 짐, 대충 청소하지 않은 집에서 1년을 살고 또 이사를 하고 그렇게 살았나 보다.

이번 이사의 특징이라면
40년 함께 살았던 TV를 버렸다는 것이고,
그동안 쌓아놓고 방치했던 책 중에 안 읽을 책들은 정리하고
책꽂이에 자알 정리하는 것이었다.

해서 준비한 건 그동안 여기저기서 줍거나 얻은 들쑥날쑥한 책장은 버리고,
새롭게 크고 튼튼한 책장을 주문했다.
2개를 주문했다가 휴가와 때아닌 비로 배송이 지연되는 바람에 2개를 더 주문했는데,
그제서야 책장의 책들이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도 정리할 책은 많지만, 그런대로 만족.

이사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지만,
그동안 말레이시아와 방콕에서 만난 아키코가 다녀갔고,
아주 만나기 힘든 강소장과 웡기가 다녀갔다. 하루 걸러.

엉클 통스 캐빈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통 나무와 한잔 하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오시오. *^^*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소박한책장>그대 이름은 아버지, 하나오와 허삼관

<하나오(a boy meets a papa and baseball)> 마츠모토 타이요, 애니북스

나무와숲 청소년 책꽂이에서 눈에 띄어 빌려온 책이다.

만화에 대해 문외한인데, 오토모 카즈히로 이후 가장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만화가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오토모 카즈히로가 누군지 모르지만, 천재적인 만화가라는 말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전 3권인데, 그중 1권을 빌려왔다.

이야기는 엄마와 함께 살던 공부잘하는 이기적인 아들 시게오가 방학을 맞아 야구에 미쳐 혼자 사는 아버지와 불쾌한 동거를 하면서 시작된다. 시게오는 '하드보일드하구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몇 장 넘기다 보니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시게오의 말이 촌철살인이다. 시니컬하기도 그렇게시니컬할 수가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
'후회는 아무리 일러도 늦는 거야.'

하나오와 시게오의 대화(누가 아빠이고 누가 아들일까?)
시게오 : 사랑이 다른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하나오 : 편식을 하지 않는 것!!!
시게오 : 아니야, 그건 '라인'이야. 서로를 간섭하거나 속박하지 않는, 서로 간의 선. 개인을 존중한다. 프라이버시를 침법하지 않는다.
하나오 :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그게 가장 인간적이지!

아버지 하나오는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황만근, 위화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 같은 사람이다. 만날 야구에 미쳐 야구를 하지 않을 때는 낮잠만 자고 방귀만 뀌고 우기기 대마왕.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얼마전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다. 10년쯤 전에 읽고 두번째다. 문학을 거의 읽지 않던 10년쯤 전에 밤새 울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어 나무와숲에서 빌려왔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허삼관이 피를 팔아 연명했다는 것 말고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왠지 딱딱할 것 같은 중국문학이지만 위화의 글은 두번째도 역시 술술 읽혔다. 하지만 이번엔 그닥 눈물이 나지 않았다. 대체 내가 감동받았던 귀절은 어디일까 하며 읽었는데, 어느새 마지막장이었다.

문화혁명 전후 찌질이도 가난한 서민들의 삶. 방광이 터질 정도로 강물을 8잔 들이마시고 한번에 400밀리미터 피를 팔고 승리반점에 가서 돼지간볶음과 뜨겁게 데운 황주 두 잔을 마시고 털어버리는 서글픈 삶이다. 흔히 자식, 가정, 가족에 희생하는 건 어머니가 아닌가?
허삼관 매혈기에서는 아버지 허삼관이 결혼하기 위해, 아내 허옥란을 위해, 자기씨도 아닌 아들 일락이를 위해, 둘째아들 이락이를 위해 피를 판다.

167쪽
일락이가 방 철장의 아들 머리를 박살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었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조차 흔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더우면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57일간 죽을 마신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냐...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나."

허삼관----허옥란----하소용
-------이락------일락------
-------삼락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은 결혼 전 단한번의 겁탈로, 허삼관과 결혼한 뒤 하소용의 아들 일락이를 낳는다. 처음엔 허삼관이 아들인 줄 알았지만, 자라면서 점점 하소용을 닮아가는 통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온 동네 사람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다.

9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일락이가 자기 씨가 아니라는 것을 안 허삼관은 일락이가 자기 아들이라면 가장 좋아했을 거라면서 그때부터 일락이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일락이는 여전히 허삼관에게 잘하는 아들이다.

187쪽
"이 쪼그만 자식, 개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 놓고는......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 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내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나중에는 네가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일락이의 생물학적 아버지 하소용이 사고가 나서 거의 죽기 직전일 때 호적상의 아버지 허삼관이 일락이에게 하소용을 위해 딱 한번 울어달라고 한다. 일락이는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 울 수 없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하소용의 집 지붕에 올라가 하소용을 위해 우는 일락이를 업고 집으로 데려가면서 다시 한번 일락이가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있으면 칼로 베 어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시간이 흘러 중국이 모택동 주석의 기치아래 문화대혁명을 겪고 허삼관의 두 아들 일락이와 이락이도 노동에 동원된다. 몸이 쇠약해져서 온 일락이를 피를 팔아 돈 몇 푼 쥐어 서둘러 떠나보내는데, 이락이가 형의 농장을 찾아갔을 때 형이 죽기 직전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이 오는 추운 겨울날 일락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돈이 씨가 말라버린 허삼관네는 동네 이집저집에서 돈을 빌려 급한대로 아내 허옥란을 시켜 병원에 보내고 자신은 피를 팔아 더 돈을 모아 아들에게 가기로 마음먹는다. 한번 피를 팔면 3개월 동안은 피를 팔아서는 안 되는데, 병원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 3일에 한번씩 피를 판다. 무리하게 피를 팔다가 쓰러져 한 병원에서 수혈을 받느라 가진 돈을 다 써버리는 불행중 불행도 겪는다.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일락이도 죽지 않았고, 장가도 가고 허삼관네도 먹을만하게 살게 되었다. 다행이다.

그대 이름은 아버지, 하나오와 허삼관
사실 나의 개인적 가정사를 볼 때 그런 아버지는 상상이 안 간다. 친아버지하며 시아버지하며 전형적인 가부장적이며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냥 우리 아버지 때 사람들은 다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통은 까칠하기는 하지만, 가부장적이지도 않고 권위적이지도 않다. 통이 아버지가 된다면 어떤 아버지가 될까? 우리 시대 아버지 말고, 우리 또래 아버지들은 어떤 모습일까?

2010년 7월 13일 화요일

나무 심기


나무와숲에 심을 나무를 고르고 있는 중.

'여행과 책' 부분을 맡았다. 어린이책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15권을 추천하는 건데, 15권 채우기가 쉽지 않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살펴보니 아이들 수준에 맞지 않는다.
너무 내 취향에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책을 아이들이 좋아할까? 은근히 부담된다.

단순한 여행보다는 기행문학 쪽을 찾아보고 있는데, 여행과 책을 결합한 책도 보인다.
일단 지금까지 고른 책은

책에 관한 책
1.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타치바나 타카시, 청어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독서가 중의 독서가. 나도 고양이 빌딩 같은 책을 보관하는 서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통이 알면 거품 물겠지만. ㅋ

2. <한국의 책쟁이들> 임종업, 청림출판
한겨레 18.0도 연재할 때도 즐겨 읽던 꼭지였는데,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나도 사고 싶은 책이다. 책에 미친 미련퉁이들의 보고서. 그들의 책에 대한 끝없는 구애가 좋다.

3. <세계 도서관 기행> 유종필, 웅진지식하우스
기행을 찾다가 걸린 신간이다. 뭐, 내가 여행기를 내면 그런 돈 많은 데다 내면 좋겠다 싶지만, 사실 웅진지식하우스 책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이 책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보다 돈이, 자본이 책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빵빵한 필자들에게 엄청난 뒷돈을 대주고 책을 쓰게 하는, 그들의 원고를 사고 있다는 느낌. 이런 책들이 얼마나 갈까, 이런 구조가 얼마나 갈까,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책이 얼마나 될까. 그런대도 서점에는 진중권과 정재승이 쓴 책이 버젓이 베스트셀러이다. 그래서 나는 배가 아프다. 책 한권을 오랜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 만드는 출판사도 많은데 그런 출판사는 마케팅할 돈이 없어 밀리고 또 밀린다. 독자들은 그걸 아는지. 광고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이렇게 뒷다마를 까는데도 이 책은 웅진지식하우스 책이다. 필자의 약력은 국회도서관관장이다. 사실 직함도 맘에 들지 않는다. '장'자 들어가는 건 된장, 고추장 빼고 다 두드러기 나는 나. 책을 살펴보고 마음에 들어 필자의 다른 책을 찾아보니 처녀작이다.
마음에 든 이유는 필자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책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세계 도서관을 다녔다. ㅋ. 아내도 사서란다. 우리나라 도서관 중에서 아직 가보지 않은 '느티나무 도서관'을 소개하고 있고, 제주도를 도서관의 섬으로 소개하고 있다. 느티나무 도서관은 책을 지키는 사람이 없단다. 없어지면 누군가가 보고 있지 않겠냐 한다. 그런 부분을 읽어내는 눈이 마음에 들었다. 제주도를 도서관의 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주도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가 안내한 대로 제주도 도서관 기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7.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 박인하, 랜덤하우스코리아
*번외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 만화 편력기> 이명석, 홍디자인

여행 관련 책
1~2. <여행의 기술>(알렝드보통, 이레)과 <먼북소리>(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여행필독서. 알렝드보통이냐 무라카미 하루키냐를 따지는 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말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

<여행의 기술> 표지인 비행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보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떠나고 싶다.

알렝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바베이도스의 눈부신 바닷가 사진이 실린 여행 안내 전단지를 보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여행의 달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날 문득 먼북소리를 듣고 37살에 문득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내 귀에 귀를 기울였다. 먼북소리가 들리는지. 그리고 먼북소리를 찾아 길을 떠났다.

3. 준, 넥서스BOOKS
'카오산로드'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된 책. 동남아여행하면 맨 세부, 발리, 푸켓, 몰디브 럭셔리한 신혼여행지, 휴양지로만 생각되고, 맨 코끼리쇼, 원숭이쇼, 게이쇼, 쇼쇼쇼, 절절절, 트레킹, 관광관광관광인 줄만 알았는데, 방콕의 카오산로드라는 곳은 전세계 배낭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에 어떤 곳인가 정말 궁금했다.

태국 방콕에 도착해 혼자 처음 찾아간 카오산로드. 24시간 술을 마실 수 있는 레스토랑, 타투, 인터넷카페, 게스트하우스, 헌책방, 길거리에 넘쳐나는 노점상과 호객꾼, 그리고 전세계 여행자들. 등산화, 슬리퍼 대롱대롱 매단 내 키만한 배낭을 메고 카오산로드로 입성한다.

굴뚝 없는 산업 관광대국 태국. 전세계 항공이 거쳐가는 허브 중 허브. 인도도 네팔도국도 유럽도 남미도 아프리카도 태국에서는 갈 수 있다. 여행을 동경하는 사람, 긴 여행을 꿈꾸는 사람, 떠나야지 떠나야지 하면서 못 떠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

4. <지구촌 사람들 지구촌 이야기> 고마쯔 요시오, 한림출판사, 38,000원
전생에 무슨 역마살이 끼었는지 여행에 관한 책, 다른 세계 이야기를 다룬 책을 보면 사족으로 못쓴다. 뭐든 무조건 사서 모아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비싸서 못샀다. 예전 회사에서 구입신청해서 가끔씩 펼쳐보며 흐뭇해하던 책.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면 집은 풍비박산났겠지. 얼마나 돌아다녔길래 이렇게 많은 사진으로 책을 냈을가? 정말 탐난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아기자기하고 뜯어보는 재미가 있는 지구촌 사람들 이야기.
완전 강추!!!

5. <헝그리 플래닛_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피터 멘젤, 페이스 달뤼시오 지음, 윌북
이 책을 여행으로 보기엔 좀 어렵지만, 훌륭한 사진 자료를 보면 전 세계를 여행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학과 환경 문제를 다른 국제적인 보도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기자인 피터 엔젤과 TV 뉴스 프로듀서 출신의 그의 아내 페이스 달뤼시오가 24개국을 아우르며 서른 가정의 저녁 식탁을 함께 하며 취재한 책.

모든 사람은 먹는다. 지역에 따라 각기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는 점은 같다. 이 책은 전 세계 24개국 가족들의 이야기와 일주일치 식품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을 보면 선진국으로 갈수록 가공된 포장식품을 많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대형슈퍼마켓에 갔을 때 엄청 놀랐다. 싱싱한 생선, 해산물을 파는 게 아니라 대부분 냉동식품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즐겨 먹는 것은 빵, 치즈, 우유, 요플레, 무슬리, 잼, 햄, 소시지, 고기, 피클, 오만가지를 담은 저장식품 통조림. 스파게티를 할 때도 면을 삶아 소스 통조림을 따 부으면 끝이고, 빵에 양치즈, 염소치즈, 소치즈를 한장 얹어서 먹으면 그만이다.
네덜란드 Enschede라는 도시에서 홈스테이를 했을 때 그들의 아침 식단.

외려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며 느낀 건 나라가 발전하지 않을수록 밥상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싱싱한 것, 건강한 것만을 먹고 산다.
라오스의 소박한 밥상

세계화, 세계화 떠들어대지만 세계화란 결국 맥도널드를, KFC를, NIKE를, TESCO를, BENZ를, NISSAN을, HONDA를, 이마트를, 홈플러스를, 삼성을, 현대를 사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18쪽
세계의 식생활을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각지의 전형적인 가정을 골라 그들이 무엇을 사고, 무엇을 기르며, 무엇을 요리하고, 무엇을 먹는지를 관찰했다. 매번 취재는 그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먹는 분량의 식품을 늘어놓고 가족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것 다 모아놓고 보니 급변한 변화의 시기를 보여주는 '음식 세계 지도'가 탄생했다.

6. <희망을 여행하라_공정여행 가이드북> 이매진피스, 이혜영, 임영신, 소나무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만남'
'어디로'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가 아니라 '관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정여행을 다녀오진 않았지만, 그래도우리 나름대로 다른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전거, 공동체, 홈스테이, 다국적 기업이 판치는 관광지, 럭셔리한 호텔은 가지 않은 것. 돈이 없어서도 못 갔지만. ㅋㅋ.

소비, 유명한 곳만 찍고찍고 다니며 관광객만 마주하는 피곤한 관광이 아닌,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희망을 함께 발견하는 여행을 추천하는 책.

7.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동아일보사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잘 알려진 빌 브라이슨. 그러나 빌브라이슨은 여행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행자들의 거리 헌책방에 가면 책꽂이 한칸은 차지하고 있는 빌브라이슨의 책.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너무 어렵고 한번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20년 동안 영국에서 살다 고국 미국으로 건너가 친구와 함께 3360킬로미터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하고 쓴 책이란다.
태국 치앙마이 헌책방 Gecko에서

태국 코판강 헌책방에서

8.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2_스페인 산티아고> 김남희, 미래인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일까?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인도? 라오스 같은 오지? 그에 못지 않게 가고 싶어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스페인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 1년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은 한국인을 만난 곳이 스페인 산티아고와 라오스 방비엥, 무앙응오이누아였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의 숙소 알베르게에서 10명 가까이 만난 날도 많았다.
그 길을 걷고 돌아온 분이 제주 올레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 강화 둘레길, 심지어 파주 심학산에도 둘레길이 생겼다. 길을 걷는다는 건 묘한 매력이 있다.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한발한발 내딛으며 하늘,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는 길.
산티아고에서 만난 오스트레일리아 일흔살 노부부. 쌀가마니만한 배낭을 매고 이 길을 걷는 것이 행복하다 했다. 이번엔 자전거로 갔지만, 나도 예순살, 일흔살에 배낭하나 매고 그 길을 걷고 싶다.
서점에 가면 산티아고 관련한 책이 거짓말 안 보태고 한 트럭은 될 거다. 그중에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하다 어중이 떠중이 남이 가니 나도 간다 하는 식의 책도 많았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알려진 책으로 추천한다.

9. <아빠와 딸 세계로 가다_80일간의 세계문화기행> 이희수, 이강온, 청아출판사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교수님이 딸과 함께 전세계를 여행하며 쓴 책.

10. <기차홀릭 테츠코의 일본 철도 여행> 문정실, 즐거운상상
*즐거운 상상의 다른 테마여행
<일본 스토리 여행_소설과 영화의 감동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이형준, 즐거운상상
<유럽동화마을 여행> 이형준, 즐거운상상
<여행자의 방> 미노, 즐거운상상

11. <유럽 축구 기행> 서형욱, 살림
여행을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기타
1. <한눈에 펼쳐 보는 크로스 섹션> 리처드 플라트 글, 스티븐 비스터 그림, 진선아이

2. <한권으로 보는 그림 직업 백과> 조은주, 유수정 글, 마정원 그림, 진선아이

3. 김영사 앗, 시리즈
<영차영차 영국축구>
<축구가 으랏차차>
<와글와글 월드컵>
<팝뮤직이 기타등등>
<패션이 팔랑팔랑>
<건축이 건들건들>
<만화가 마냥마냥>

*도감류
보리 <식물도감> <나무도감>

*추천만화시리즈
<식객>
<명가의 술>
<헬로우 블랙잭>
<내마음속의 자전거>

*나무 과정이 볼만한 잡지 : 과학쟁이, 위즈키즈

*차차 추천
<빨강머리앤> 1, 2, 3 루시 M. 몽고메리, 시공주니어
<빨간머리앤> 1권짜리.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인디고

*그외 나무와숲에서 이빨 빠진 책들
<먼나라 이웃나라_일본편> 일본인편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1

2010년 7월 9일 금요일

나무와숲 후기

아주 오랜만에 생기 넘치는 모임이 있어 모처럼 후기를 써 본다.
나무와숲은 통네 학교 <더불어가는배움터길>의 도서관 이름이다.
중고등 통합과정인데, 나무는 중등과정, 숲은 고등과정이다.
그래서 나무와숲. 이름이 맘에 든다. 나무와 숲의 지킴이.
뭔가 전생이 각별한 인연이 있었을 거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ㅋ. 숲은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려는지 모르지만...

나무와숲은 청소년지킴이와 어른지킴이로 구성되어 운영된다.
어른지킴이는 어머니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진다.
오늘 모임은 어른지킴이 모임이다. 처음 참가하는데 상반기 평가 모임이란다. ㅋㅋ.

돌고래, 담쟁이 두 샘과 어머니 다섯 분, 그리고 나 이렇게 모였다.
나는 1학기 끄트머리에 깍두기로 끼었다.

상반기 지킴이 활동 평가, 도서선정위원회 회의 보고, 얼마전 있었던 시음회 평가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가장 중요한 논제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책에 흥미를 가질까, 많이 읽을 수 있게 수 있게 할까? 어떻게 하면 도서관에 끌어들일까? 도서관에 오래머물게 할까 등등이었다.

예전 회사 다닐 때 회의가 생각났다. 어떤 책을 만들면 좋을까? 어떤 책이 잘 팔릴까? 그 중심에는 책을 읽는 아이들도 중요하지만 구매자인 엄마들의 니즈가 중요하다. 엄마들의 니즈를 파악해야 한다. 어디서 파악해야 할까...등등등...

여기 있으니 엄마들이 바라는 것이 느껴진다. 패션잡지, 스포츠잡지라도 두어서, 아니 다독왕에게 패션잡지 상품권을 주어 아이들을 도서관에 오게 하자. 주니어명작이라도 읽게 해서 고전에 관심을 갖게 하자. 주니어플라톤이라는 독서토론프로그램을 만들고 이어 논술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지긋지긋했던 논술. 고전을 어린이눈높이에 맞게 줄이고 각색한 다이제스트주니어세계명작은 오히려 그것을 읽고 다 읽었다고 생각해서 정작 원서는 읽지 않을 수 있다, 고전은 고전 그대로 읽어야 제맛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거라도 읽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있다. 그리고 대안학교임에도 논술잡지, 과학잡지에 대한 니즈가 있다.

도서선정모임에도 얼레벌레 참가하게 되었다. 어떤 책을 선정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현재 나무와숲의 책꽂이를 보면 성인도 읽을 수 있는 일반도서와 청소년도서로 구분되어 있다. 아직 3000권이 안 되기 때문에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청소년 도서도 아이들이 손이 갈 만한 책이 안 보이고, 일반도서 역시 청소년이 읽기엔 무거운 책이 많다. 그래서 더 고민이다. 뭐 행복한 고민이라 해야 할까? 책을 만들면서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책에 파묻혀 살면 좋겠다 생각했다. 書痴, 책바보라 해도 좋으니 책만 읽으며 지내고 싶었다. 이제 그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도서관지킴이로 책을 소개하고, 선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이렇게 훌륭한 기회가 주어지다니 복도 많다 싶다.

그런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서관지킴이에 대한 자족이 아니라, 오늘 모임의 분위기다. 지킴이들이 엄마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말 열정과 의욕이 넘친다.

"방학에 도서관 운영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희망 사항은 2번은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최소 1번이라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모임하러 왔다가 책이라도 빌리지 않을까요?"
이때 난 속으로 '에이, 방학인데 쉬지 뭘 문을 열어.'
다른 어머니 왈, "아무때고 상관없으니까 제가 지킬게요."

"도서 선정에 대한 지킴이들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책 선정도 중요하지만, 희망도서를 추천한 사람에게 책을 구입하면 문자로 알려줘서 가장 먼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대출 권수가 작으면 온 가족의 이름을 동원해서 책을 대출해 갑니다."
"막대그래프를 만들어서 누가누가 많이 읽는지 표시해요."
"학기 중에 못 읽은 애들을 위해서 방학 깜짝 이벤트를 하는 거예요. 방학 때 많이 읽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면서요." 
"저는 목요일 담당인데, 아이들에게 대출 영업을 하러 갑니다. 얘들아, 목요일은 무슨 날? 목요일은 책 대출하는 날!" 

무슨 책이 갑자기 사금융 대출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대출은 1582-8210. 원캐싱원캐싱.

아무 준비없이 와서 즐겁게 웃으면서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모두 바쁘신 것 같은데 열심히 의견을 내셨다. 도서관에 가장 많이 오는 나현이의 어머니는 詩吟會도 試飮行事로 만드시며 시종일관 분위기를 재미있게 주도하셨다.
실은 어제도 책선정위원 회의가 있었는데, 어제의 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한층 활기가 느껴진다. 이런 게 열정 바이러스인가? 의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 옆에서 옮을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푸념, 불평만 털어놓으면 나는 해방될지 모르나 다른 사람이 푸념, 불평, 불행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의욕적이고 건강하고 희망이 담긴 긍정의 힘은 다른 이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내 불행은 내 불행으로 끝내야 한다. 밝고 긍적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 나에게 그런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는 얼굴에 만날 인상만 쓰고 사람들과 말섞기도 싫고, 파주까지 다니는 것도 싫고 모든 인관관게도 싫고 그저 그만두는 것만이 나에게 살 길이다 싶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1년 여행이 숨통을 트게 해 주었고, 이제 뭔가 새롭게 하고 싶다는 의욕이 조금 생기는 것 같다. 쉬어야 할 때마다 쉬진 못하겠지만, 누구에게나 숨이 깔딱깔딱할 정도로 절박한 때는 찾아온다. 쉬어야 할 때 쉬어주는 것도 긴 인생에 크게 손해보는 일은 아닌 것 같다.

2010년 7월 8일 목요일

어지러운 시대, 바람 앞 촛불 같았던 여인네들의 삶

요즘 도서관을 드나들며 하루 3~4시간씩 책을 읽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권이 몇 권이나 되는지도 모르겠다.
오나노부 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천하를 통일한 사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아주 우습다. 딱히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다.
뭐 일본 문화에는 관심이 있다.
이어령 교수가 쓴 <축소지향형의 일본인>, 수학의 달인 김용운교수가 쓴 <일본인과 한국인>,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 전쟁과 원폭의 피해에 대해 다룬 <맨발의 겐>을 동시 다발로 보고 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게 된 건 아주 우연이다.

도서관 책꽂이에서 눈에 띄는 책 몇 권을 갖다놓고 자리에서 읽곤 하는데,
쌀집아저씨 김영희 PD의 아프리카 여행기 <헉, 아프리카>가 눈에 띄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린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장소, 마신 맥주, 배낭 등을 그림으로 그렸다. 부러워라....

프롤로그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꾀꼬리가 울지 않으면
오다 노부나가는 꾀꼬리를 죽이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꾀꼬리를 울게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꾀꼬리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이름도 겨우 외우는 난데, 그들의 '새'에 대한 취향까지 알다니, 대단한걸?
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뭣도 모르면서
2000년 혼자 일본을 여행했을 때 닛꼬를 보지 않고는 일본을 봤다고 얘기하지 말라고 해서
닛꼬를 찾아갔는데, 거기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인 동조궁(도죠구)을 갔었더랬다.
우낀 게 사람까지 신격화해서 동조궁 신사라고 한다.
엄청 화려한 색으로 치장햇고,
신사 앞에 엄청 크고 쭉쭉 뻗은 삼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아직 전권의 수도 파악을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 읽을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일본에서는 1억 5천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중 베스트셀러란다.
중국을 알려면 <열국지>를 읽고 일본을 알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으란다.
역사드라마도 싫어하는데, 역사소설이라니 과연...

첫장을 펼치니 당시 권력을 가졌던 무사들의 지형도가 나온다.
맨 뒤로 가니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계도와 인물 사전, 당시 시대 어휘 사전, 시간 구분, 복식, 연표 등등이 있다. 이해도 안 되면서 뚫어지게 보고 또 봤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맹우였다고 한다. 맹우라는 절친이라는 뜻이겠지?
오다 노부나가가 9살이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났다.

난세의 영웅들 탄생이 그러하듯,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생도 정략결혼의 결과물이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이 성의 성주와 저 성의 성주가
살기 남기 위해 자기 딸과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부모형제도 단칼에 베어야 하는,
싸우면서 서로 미워하고 미움받는 끝도 없는 무간지옥이다.

오늘 1권을 끝내고 2권에 들어갔다. 아직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걸음마를 하는 시기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칼과 함께 살아가는 남자들의 그림자 같은 불행한 여인들의 삶만 읽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는 아버지 히로타다의 계모 케요인의 딸이기도 하다.
옆 성주의 다섯 아이를 낳은 케요인은 힘이 없다는 이유로 히로타다의 아버지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사랑하는 아내를 남에게 빼앗긴 오다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마저 그 자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야 했다.
히로타다에게는 소실 오히사가 낳은 켄로쿠, 치케이 두 아들이 있다. 치케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 오다이가 정실이라는 이유로 오히사의 둘째 치케이는 걸음마도 떼기 전에 출가를 시켜야 했다. 하지만 여자 팔자 뒤둥박이라고, 오다이의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히로타다의 세력이 약해지자 주변 성주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결국 히로타다는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오다이와 이혼하고 오다이를 본가로 돌려보낸다. 부록을 보니, 오다이는 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리나라 조선초기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는 일들. 여자는 그저 대를 이을 씨받이,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려지는 노리개와 같은 불행한 운명이다. 너무나도 순종적으로 남자들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는 여인네들의 삶이 서글프다.

<이야기 일본사>를 읽다 당시 시대 상황을 나타내는 '정략결혼'에 관한 내용이 있어 옮겨본다.
정략결혼, 210~211쪽
전국시대의 여성들은 인격마저 무시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국시대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의 여성은 상속권까지 인정받고 있었고 그후 무로마치 시대에도 가마쿠라 시대에 비하면 그 권리가 다소 줄어든 감이 있긴 하였으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충분히 보장받고 있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인격이 무시당하는 사례는 흔히 정략결혼에 의해서였다.
사이토 도산의 딸로 오다 노부나가의 아내가 된 노히메를 비롯하여 호죠 우지야스의 딸로 다케다 가쓰요리의 아내가 되었던 여성, 노부나가의 누이동생으로 아사이 나가마사의 아내가 되었다가 나가사마가 죽자 시바다 가쓰이에의 아내가 된 여성 등 정략결혼으로 인권을 무시당한 여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노부나가의 아내 노히메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노부나가는 매일 밤 노히메가 깊은 잠에 들기를 기다려 슬그머니 그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노히메가 어느 날 노부나가에게 그 이유를 묻자, 노부나가는
"부부 사이에 숨기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요. 내 진정 그 비밀을 말하리다."
라며 다음과 같은 비밀을 털아놓는 것이었다.
"일찌기 미노국의 중신과 은밀히 약속하기를 그들이 장인(사이토 도산)을 죽이고 봉화를 올릴 터이니 봉화가 오르거든 즉시 공격해 가기로 하였다오. 그리하여 매일 밤 그대가 잠들기를 기다려 미노국 쪽에서 봉화가 오르는가를 살핀 것이오. 행여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마시오."
그러나 노히메는 이 비밀을 곧바로 그의 친정아버지 사이토 도산에게 전하고 말았다. 그러자 도산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의 중신을 죽여버렸다. 결국 노히메는 노부나가의 책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사실은 노부나가가 그의 아내가 틀림없이 자신의 말한 비밀을 도산에게 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넣고 꾸며댄 이야기로 사이토의 분열을 꾀한 것이었다.
애정괴 신뢰로 맺어져야 할 부부 사이가 이렇게 험악해진 것은 바로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다케다의 경우 무사는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부부 단둘이만의 자리에서도 칼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정략결혼으로 시집온 여성들은 결혼한 그날부터 소소한 일까지 모두 감시를 받게 마련이었다.
외계와의 접촉이 단절당한 채 저택 깊숙한 곳에 틀어박히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최후에는 자결을 강요당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지기도 했다.
인간 본래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신의 누이나 딸을 결혼시킨 후 불필요하거나 방해되는 존재가 되면 그녀의 남편과 함께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바로 정략결혼의 비정함이었다.

이리 오라면 이리 가야 하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찍소리도 못하는, 여인네들의 삶이 개보다도 못한 시대가 있었다니. 무로마치 시대나 가마쿠라 시대에는 그나마도 나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매정하고 비정하고 비정상적인 일들은 인간사회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가? 전쟁이 터지면 가장 힘이 없고 약한 존재는 여성, 노약자 들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그 남이란 가족도 포함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전쟁터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고마워해야 하나.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왜 전쟁에 열광할까?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2010년 7월 3일 토요일

술고프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명색이 아오조라, 푸른하늘인데, 오늘처럼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 너무나 좋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막걸리처럼 보이고.
박달동 생활 만 2개월만에 첨으로 집에서 700미터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오면서 
내려다보이는 안양천. 캬, 오늘 정말 술맛 나겠다...감탄이 절로 나오는 날.

해도 요즘 내 생활이 마냥 칠렐레 팔렐레 할 수만은 없어 
가까이 사는 갱이언니부터
파주로 매일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는 은영부터
지난 주 일욜 새벽까지 끌고 다니며 양주 사준 웡기부터
술 하면 떠오르는 최목수부터 
지난번 벙개도 쌩깠던 동기 모임부터 별의별 껀수가 다 생각나고 술이 고팠다.

술 자체가 좋다기보다 그냥 이런 날 술꾼들끼리 모여 낄낄 거리는 그 분위기가 더 그리웠다고 해야 하나. 성삼 오라버니도 생각나고, 영우 오라버니도 생각나고. 
직업, 성별, 빈부차, 성적 취향,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술꾼들이 마구 생각나는 날.
대학교 교생 실습 갔을 때 담임선생님도 생각나네. 선생님도 한술하셨거든.
볼프람도 생각난다. 하루종일 자전거와 씨름하고 5시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일단 맥주 2병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시작하는 볼프람.
흑, 오늘 같은 날 볼프람이랑 술마시면 정말 좋겠다. 볼프람은 뭐하고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술통, 통이
회의가 있다고 오후에 학교에 갔는데, 아무도 통이 오늘 제정신에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8시에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럴 수가!!!
그러더니 학교 축제를 위해 징집 당해 요즘 열심히 추고 있는 스윙댄스를 춘다. 


허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살짝 맥주 한 잔할까 운을 띄우더니 얼마나 술을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겠다고 
자신을 시험대에 올린다. 

술에 대한 본능을 가까스로 이성으로 누르고 컴 앞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11시 반쯤 술꾼 은영한테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묻는다. 
"언니, 지금 어디예요? 지금 당장 갈게요. 하하하하."
전화기로 살짝 술냄새가 전해온다. 
"오늘 같은 날 언니가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거 같아서, 하하하하. 마신 술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요, 하하하하. 염치불구하고 그리로 가려고요, 하하하하."
"어? 나 시댁이야."
"지금 어디야?" 
"합정역이요. 하하하하."
내 맘이, 지금 합정역 아니 철산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게 지금 내 맘이야. 

내일 시간이 되면 무한도전 하는 시간을 피해 만나자고 하고 
아쉬운 마음을 진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통은 헤드폰을 끼고 브라질 : 네덜란드 축구를 보고 있다. 
마침 담배를 피러 나가는 통에게 속삭였다.
"맥주 3병 콜?"
하하하하, 나는 결국 지금 맥주를 마시고 있다. 

2010년 7월 1일 목요일

나무와숲에서 생긴 일

요즘 통네 학교 도서관 '나무와숲(이름이 맘에 든다.)'에서 일주일에 한번 2시간씩 도서관지킴이를 하고 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하루에 고작 5~10명이 책을 빌려가는 도서관이라 지킴이로 할 일은 없다. 청소년지킴이와 잘 지내는 일이 어른지킴이가 할 중요한 일이라고 들었다. 그 활동으로 청소년지킴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있다.

내가 당번인 날 청소년지킴이인 아이는 눈썹이 진하고, 말도 붙임성있게 잘하는 아이이다. 첫날은 아무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자리만 지키다 왔고, 두번째날은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부담만 갖다가 결국 가는 당일날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 뽑아 읽어주자 싶어 가져갔는데, 청소년지킴이 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냐고 묻는다. 잉, 아닌데. 몰랐는데. 했더니 당연히 알 줄 알았죠. 지킴이 일지에 서지 목록도 써야 하는데. 이런.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공염불이었네.

나랑 같은 당번인 아이는 책이 싫단다. 그럼 왜 도서관지킴이를 하느냐 했더니 자기는 학교가 좋단다. 초등학교도 인근 벼리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나왔단다. 일반학교에 대해서는 친구들을 통해 들은 게 전부여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다니고 있는 대안학교가 좋단다. 그래서 학교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는데, 도서관지킴이를 구한다고 해서 자원했다고 한다. 그외에서 컴퓨더 관리도 한다고 한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어주어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도서관의 책이 아니어서 펼쳐보지도 못했다. 일지를 살펴보니 박기범의 <문제아> 같은 책을 읽어준 게 보인다.

ㅋ. 내가 가져간 책은 <일본고서점그라피티>라는 일본헌책방에 관한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일본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내부구조도를 그리고 헌책에 대한 의견, 헌책방에서 구한 책 이야기 등을 써 놓은 책이다. 책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하려고 선택한 책인데 물건너 갔다.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 구입해서 갖춰놓고 읽어주어야 할까, 암튼 보류.

그리고 나서 황급히 책꽂이를 뒤져 고른 책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우리나라에서 한비야를 모르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다소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물, 한비야. 역시 그 아이도 알고 있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알고는 있지만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옳거니. <중국견문록> 외에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같은 책이 있었지만, 내가 읽은 책인 <중국견문록>을 골랐다.

하루에 읽어 주는 양은 한 챕터. 책을 읽어 주기 전에 책을 고를 때 어떤 것을 먼저 보냐고 물었다. '차례요.'라고 대답한다. 먼저 저자 약력을 소개하고, 판권을 살펴본 뒤, (머릿말을 읽어주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장을 읽어주었다.

한비야는 44살에 중국어학연수를 떠났다. 단지 전세계 4분의 1이 쓰는 언어라서 배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에서 일을 하려면 중국어가 필요하겠다 싶어 중국어학연수를 떠났다 한다.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외국어 다섯 가지를 마스터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장 "너무 늦게 왔는데요"를 읽어주고 어땠냐고 물으니, 감동적인데요 한다. 실패하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책 잘 읽으시는데요. 이 녀석이, 귀가 뚤리긴 했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다니. ㅋ. 44살이라는 나이에 배낭 하나 매고 1년 어학 연수를 떠날 수 있는 한비야의 용기가 부러웠다. 라오스를 여행할 때 도시 혹은 두메산골에서 '월드비전' 사무실과 '월드비전' 파놓고 간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 자아도취에 빠져 다음에도 이 책을 읽을까 하니, 냉정하게 책도 많은데요, 한다. 그래그래. 알았어, 다음엔 다른 책으로...ㅠ.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명색이 도서관사서라고 앉아 있다가 책 한권을 빌려 왔다. 행여 누가누가 책 많이 빌리나 순위에 들고 싶어서는 절대 아니다. 이 많은 책을 두고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그날따라 눈에 띄었던 창비에서 낸 성석제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뽑아왔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부채부터 해서 꽤나 많은 광고와 판촉물을 날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도 읽지 않았던 책인데.

목록을 보니 우선 <책>이라는 단편이 눈에 띈다. 책읽기보다 책 자체를 좋아하는 나는 책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저절로 그리로 간다. 이 책의 주인공인 '당숙'의 포스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책을 사다 나르는 나의 행태에 불만을 느끼는 통이 통감할 내용이 아닌가 싶어 잠깐 옮겨 본다.


당숙은 책이 많다. 책이 많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달라 열권으로도 많은 사람이 있고 만권도 적은 사람이 있다. 당숙의 기준으로 책이 집안을 채우고 넘치게 되면 많은 것이고 더 들어갈 여우가 있으면 적은 것이다.
당숙에게 책이 많아진 건 이미 3년이 넘었다. 이로 인해 고민스러워진 사람은 당숙이 아니라 당숙모다. 당숙이 이런 일로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많은 책을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이 대목에서 나는 통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더 대범하게 책을 들여놓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당숙모는 3년 전부터 집을 채우고 남은 책은 아파트 지하에 창고를 지어 보관해 왔는데 그 창고마저 비워주어야 할 형편이 되자 이삿짐쎈터에 책을 맡겼다고 한다. 종이상자에 책을 담아 보관해주는 비용은 한달에 십오만원이고 일년으로 장기계약하면 십이만원으로 할인은 해준다.(옳거니)

대략 줄거리는 이처럼 책이 많은 당숙을 둔 조카가 당숙의 책을 맡아주겠다고 나서고 모월모시 그 책을 자기 집으로 옮기는 이삿날의 이야기다. 이삿날 책보다 먼저 조카의 집에 온 당숙은 조카의 집에 있는 잡지 몇 권에 넋이 나가 자기 책 이사는 남의 일처럼 관심이 없고 책만 읽다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표현했을까? 싶은 마음과 함께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이어 이 책의 표제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과 <천애윤락> <욕탕의 여인>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천하제일 남가이>를 죽죽 읽어나갔다.

과연 듣던 소문대로 성석제의 입심이 장난이 아니다. 김원룡이 쓴 <나의 인생 나의 학문>을 읽으며 킬킬 댔을 때 무슨 만화책이라도 읽냐고 놀림을 받았는데, 성석제의 소설 역시 가슴을 후벼파는,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찌질이 루저들의 이야기임에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빅재미를 주고 웃음이 뻥뻥 터진다.

주인공 하나같이 그렇게 바보처럼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도무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있나. 세상의 모든 비극은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읽는 내내 영화 <파이란>의 최민식이 떠오른다. <천애윤락>의 주인공 친구 동환이 이야기를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눈물이 나서 혼났다. 옘병. 나보고 이 책 인물들처럼 살라고 하면 진작 접싯물에 코박고 죽었을 거다. 이런 된장. 

2010년 6월 29일 화요일

1년 전 오늘,..09년 6월 29일 월요일

어제 통과 함께 안양천을 걸으면서 1년 전 어디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독일에서 덴마크로 넘어가려던 시기였다. 오랜만에 여행 수첩을 꺼내 찾아보니 우리의 기억이 맞았다. 일기장을 아낀다고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이 적은 일기가 반갑다.

09년 6월 29일 월요일. 06:30 AM. 또 다시 찾아온 월. 덴마크로 간다.
침낭 안이 덥다. 가끔 물 떨어지는 소리. 아, 어젯밤에 멀리서 갈매기 소리가 들렸다. 항구 가까이여서 그런가. 숲에선 온갖 새들 소리가 들린다. 독일은 야생 새들의 천국인 것 같다. 이상한 꿈-오빠가 술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불길하다. 왜 오빠는 그렇게 남을 탓하며 살 수밖에 없는 걸까? 통 코고는 소리, 새소리, 간간히 기차소리, 차소리.

오늘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독일 북부 날씨는 아침 흐리고 비, 저녁이면 맑은 하늘을 보인다. 지금이 몇 시일까? Fermann burg 공원. Fermannsund bruke를 넘기 위해 같은 길을 한 바퀴나 돌았다. 들판 옆길 닫힌 철문을 열고 나가야 207번 도로를 탈 수 있다. 옘병! 가는 길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오는 길은 아주 simple하면서. 한 할아버지의 설명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기 전 통이 아주 비장하게 앞서 나가면서 외친다.
"내 뒤에 따라붙어! 바람이 많이 부니까!"
Fehmannsund bruke는 한 500미터나 될까? 생각만큼 바람은 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통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다.

*주행기록
주행거리 : 44.44km
주행시간 : 3:24:08
평균속도 : 13.0km
최고속도 : 28.9km
총 거리 : 636.2km

*쓴 돈 :
1)슈퍼마켓 penny에서
pilsner 맥주 6병*0.5l 1.69유로
플라스틱 병보증금 1.50유로
돼지고기 완자(술안주) 1.75유로
스파게티 500g 0.49유로
오이 0.39유로
5.82유로(약 10,000원)

2)엽서 1.05유로

*합계 : 6.97유로(약 12,000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덴마크로 가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며칠째 달리던 날이었다. fehmann이라는 섬을 넘어 배를 타고 덴마크로 가야 하는데, fehmann 섬으로 가는 도로를 눈앞에 두고 진입로를 찾지 못해 몇 바퀴를 돌았던 것이 기억난다.


통로를 찾고 보니 개구멍만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는 사람만 다닐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씩씩거리며 찾아헤매다 fehmann 섬에 도착해, 도착한 기쁨과 이제 곧 덴마크다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슈퍼에 가서 플라스틱 맥주 6병(싸서 아주 머리가 아픈 술)과 돼지고기 완자를 사서 낮술을 마시고 퍼졌다. 술을 마시고 취한 나는 오늘 저녁 덴마크 가는 배를 못 타겠다, 통은 왜 못 타냐, 덴마크 넘어가서 텐트 칠만한 곳을 바로 찾겠냐, 차라리 여기서 하룻밤 더 자고 내일 넘어가자 대판 싸우고 말도 안 하고 잤던 안 좋은 기억도 더불어 떠오른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날도 많았지만,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평생 싸울 걸 다 싸우고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우린 가끔씩 싸운다. 싸움은 싸움일 뿐 삐치지 말자. 아, 이 질기고도 질긴 애정이여!

어떤 여행 이야기를 골라 읽어야 하는가?

어떤 여행 이야기를 골라 읽어야 하는가?

인생이 여행이고, 여행이 인생이다. 따라서 여행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철이 들면서부터 여행을 가까이 하는 일은 인생을 배우는 데 있어서 여간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여행이란 이름이 붙어나오는 여행 이야기가 하루에도 수십 종, 수백 종에 이르는데 그 많은 여행 이야기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골라 읽어야 하는가? 이것도 매우 필요한 결정이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좋은 여행 이야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마치 훌륭한 스승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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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문학전집의 추천사인 '어떤 작품을 골라 읽어야 하는가'에 나오는 '문학'이라는 단어를 '여행'으로 바꾸어 보았다.

인생이 문학이고 문학이 인생이다. 따라서 문학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철이 들면서부터 문학작품을 가까이 하는 일은 인생을 배우는 데 있어서 여간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문학이란 이름이 붙어나오는 작품이 하루에도 수십 종, 수백 종에 이르는데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골라 읽어야 하는가? 이것도 매우 필요한 결정이다. 어떠한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좋은 책을 대하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마치 훌륭한 스승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그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문학'이라는 단어를 '여행'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여행과 문학은 동격이다?
실로 좋은 책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접하게 해 주고, 내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게 해준다. 직접 두 발로 찍고 돌아다니는 여행은 넓은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되고, 다른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는 간접 경험과 대리 만족이 되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많은 여행책을 사서 모았고, 여행 이야기, 기행문, 역사, 문화, 예술 등 많은 책들이 낯선 곳에 대한 여행을 꿈꾸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가 내 가슴에 불을 질러 주었듯이 시덥잖은 나의 여행 이야기가 여행을 꿈꾸는 누군가의 가슴을 사정없이 불질러 주었으면 좋겠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100625. 금. 소소한 일상이 기다려진다.

한국에 돌아온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벌써 두 달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통과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여행 내내 매일 쓰던 일기도 쓰지 않고, 보고 대회처럼 쓰던 블로그도 개점휴업 상태로 내팽개쳐 두었다. 내 맘이 요즘 그렇다.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을 여행하면 좋겠다 싶었다. 제주도 자전거 여행이나 남도 자전거 여행도 좋고, 산티아고를 달리면서 제주도 올레길이라든지 지리산 둘레길도 걸어보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와 집이 없는 상태로 동가숙 서가식 하다보니 여행을 떠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도 안 만났던 건 아니다. 친구들도 만나고 산청에도 두번 다녀왔고, 괴산도 잠깐, 짧게 남도 여행도 다녀왔다. 때론 지치기도 했고, 때론 휴식도 되었다. 모두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인데, 그동안 외국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둘이서만 빈둥거리다 한꺼번에 사람들을 만나려니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 위장, 간장이 버텨내지도 못했던 것 같고. 그래도 모두 반가웠다.


7월 말경에 새 집으로 이사를 갈 것 같다. 이사 가기 전까지 좀더 시댁에서 지내야 한다. 어머니 냉장고 옆에 우리 냉장고, 어머니 세탁기 옆에 우리 세탁기, 어머니 장농 앞에 우리 장농, 우리 서랍장 위에 어머니 서랍장, 한 방 가득 채워져 있는 책장과 책들...을 추스리고 이사 준비를 해야 한다. 냉장고도 정리하고, 안 입을 옷도 정리하고 해야 하는데, 아직 시간이 있어서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금 가장 기다려지는 건, 손으로 빡빡 문질러 빤 빨래를 탁탁 털어, 좋은 볕에 말리고, 빨래가 마를 때까지 책 읽다가 졸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다.



덴마크를 달리다 발견한 빨래

프랑스 순례자용 숙소에 널린 순례자 빨래


스페인 어느 가정 집에 널린 빨래

스페인 순례자의 길 순례자용 숙소에 걸린 빨래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100518. 비오는 화요일...나는 달리고 달렸다..

비가 온다.
봄비라고 하기엔 어색한 비가 온다.
이 비가 그치면 따뜻해지려나 다시 추워지려나 종잡을 수 없는 오락가락하는 비.


며칠 새 이틀 간격으로 달렸더니 몸과 마음이 지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반갑지 않거나 부담스러운 사람은 만날 수도 없어.
몸이 말을 안 들어.

무더기로 만나다 보니 인사만 나누고 그냥 술만 펐던 것 같아.

반가워서 마시다 택시에 몹쓸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오랜만이라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술잔을 들기도 하고,
술도 덜 깬 지친 노구를 끌고 동기 모임 갔다가 술 안 먹고 안주만 축낸다고 구박만 잔뜩 먹고,
새벽 한 시에 고등학교 친구네 잠자러 갔다가 친구 남편 보기만 미안하고,
이래저래 민폐도 끼치고 부족한 이야기에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만나길 잘했어.

하지만 난 달리기보다는 걷는 게 체질에 맞는 거 같아.
담에 만나면 천천히 걷는 기분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눈도 맞추고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지.

2010년 5월 6일 목요일

D+365. 100430. 금. 드디어 그리고 무사히 1년 만에 한국으로...

2009년 5월 1일 떠났던 한국,
2010년 4월 30일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방콕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2시간 비행을 거쳐,

쿠알라룸푸르 LCCT 공항에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으로 이동해 9시간의 기다림,

다시 쿠알라룸푸르에서 인천까지 약 6시간의 비행.

한국은 유럽에 비하면 참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곳을 1년만에 돌아간다. 1년만에 돌아올 곳을 우리는 왜 떠났을까? 1년 동안 난 뭘 보고, 뭘 느꼈을까? 뭐가 달라졌을까? 뭐가 달라지긴 달라졌을까?

비행기는 이착륙할 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사고 위험이 높아, 승무원들도 안전에 안전을 확인하고 조심하는 긴장되는 순간이다. 우리도 나라와 나라를 이동할 때 가장 많은 돈이 많이 들고 가장 신경이 예민해진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다보니 일반 여행자보다 2배 3배는 짐이 더 많다. 리스본에서 자전거를 먼저 프랑크푸르트로 부치고 바르셀로나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갈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올 때 불어난 짐들에 과연 추가부담없이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인가가 가장 관건이었다.

1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방콕에서 쿠알라룸푸르, 쿠알라룸푸르에서 인천으로 마지막 비행이 남아 있다. 과연 우리의 자전거, 짐들과 함께 과연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를, 우리 자전거를 무사히 아무 불평불만없이 한국으로 보내줄것인가? 공항 직원들만 보면, 보딩을 하러 갈 때면 가슴이 콩알만해진다.
방콕 카오산에서 타는 리무진 AE2에 실은 자전거 박스. 한 박스당 50B의 추가 비용을 내면 실어준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정신없이 자전거 박스를 두 개에서 세 개로, 세 개에서 다시 두 개로 풀었다 쌌다 하면서 어느새 이골이 났다.
하도 싸고 풀었다 싸고 풀었다 해서 구멍이 나 버린 박스.

통은 있는 힘껏 박스를 오무리고 나는 테이프를 뜯어 볼펜으로 짝짝 끊어 붙이면서 우리 공항에서 반값에 포장서비스나 할까 하는 농담까지 할 정도로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2010년 4월 30일 오천 6시 30분.
한국을 떠난 지 꼬박 1년 만에 무사히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슴이 설렌다.

1시쯤 샌드위치를 먹고 잠이 들고, 5시쯤 다시 기내식을 주었는데 졸음이 밀려와 졸다 보니 어느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쌀쌀한 날씨가 우리를 반긴다.
기내방송에서 8도라고 했지? 8도?
연일 38도 이상의 날씨에서 5개월 가까이 생활하다 보니 감이 잘 가지 않는 날씨다.

쌀쌀한 날씨에 정신이 들었나,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다 일기장을 놓고 내렸다. 짧은 다리로 헐레벌떡 탑승구로 달려가니 벌써 문이 닫혔다. 승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짐을 놓고 내렸다고 부탁해 다시 문을 열고 비행기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가는데, 통이 흘리고 간 자전거가방 끈이 보인다. 이론 나만 흘린 게 아니었네. 자리에서 무사히 일기장을 찾아 나왔다. 십년감수한 순간.

자전거를 찾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출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부모님께서 공항에 나오시겠다는 걸 리무진을 타고 가겠다고 나오지 마시라고 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 이제 정말 한국이구나.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구나 안도감이 밀려든다.

마지막 남은 관문은 자전거 박스를 싣고 무사히 안양 시댁으로 가는 것. 리무진노선표를 둘러보니 '석수동'을 지나는 리무진이 보인다. 한 장에 9,000원씩 표 두 장을 끊고 8시 50분 버스를 기다렸다. 리무진이 도착해서 자전거를 실으려하니 한 대당 2,500원 해서 5,000원 추가 요금을 내라고 한다. 비싼 금액도 아니고 실을 수도 있다니 다행이다 싶다. 우리나라도 참 좋구나.

짐칸에 자전거박스를 싣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집까지 1시간 남짓 남았다. 인천대교를 건너 광명을 거쳐 안양으로 오는 길. 아, 봄이구나. 겨우내 메말랐던 산자락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은 나무들이 참 이쁘다. 어, 꽤나 나무가 많아 보이네. 이렇게 나무들이 많았나?

따뜻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버스는 KTX 광명역을 지나치고 있다. 석수역 앞 중앙차로에 도착했다. 자전거박스를 번쩍 들어 길 건너 주유소앞으로 옮겨 어머니와 아버님을 기다렸다.

바람부는 안양대로에서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오매불망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던 어머니, 아버님이 나타나셨다. 우리 어머니, '아이구, 우리 애기! 별일 없었어?' 하시며 꽉 끌어안아 주신다.

아버님 차 뒷좌석에 자전거 박스 하나, 자전거 박스 풀어 자전거 한 대를 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년을 떠돌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